오늘 배워서 내일 가르치는 나의 Canva 도전기
나는 사범대 출신이다. 대학 때 전공이 국어교육이라고 밝히자면 살짝 부끄러워진다. 왜인지는 모르게 사람들은 국어교육과 나온 이, 즉 국어 선생님에 대한 기대가 높다. 말씀은 품위 있게 하시고, 글은 논리 정연하면서 동시에 아름답게 쓰실 것으로 생각한다. 물론 이런 기대는 허상에 불과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을 봐도 그렇다(친구들아 미안).
아무튼 대학 시절 내 지도교수님은 "선생이란 배워서 남 주는 직업!"이라고 외치셨다.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냐", "공부해 두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너의 자산이 된다"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니 요즘은 아무도 이런 말을 안 한다.) 우리는 배워서 남 줄 사람들이다,라는 건 교수님 나름의 유머였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걸 보니 꽤나 괜찮은 유머였다.
그 말씀을 들을 때만 해도 "배워서"의 시점과 "남 주는"의 시점 사이에 상당한 시차가 있는 줄로 생각했다. 예를 들면, 대학 때 열심히 배워서 졸업 후 학생 가르칠 때 쓴다는 식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오늘 배운 것을 내일 남 주기도 하고, 심할 때는 오늘 배운 것을 오늘 남 주기도 한다. 세상이 빠르게 변한 탓이다.
오늘 배워서 내일 남 주는 일을 처음 한 것은 2000년대 초반 유학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 국어교육과를 나온 나는 (황당하게도) 미쿡에서 유학을 했다. 어쩌다가? 왜? 라는 질문은 다음에 답하기로 한다. 내가 조교로 일하면서 모셨던 교수님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던 "interactive advertising" 분야의 big shot(어려운 말로 태두쯤 된다)이셨다. 이분의 조교 업무는 다른 조교 업무와는 차원이 달랐다. 교수님의 서버와 홈페이지 관리는 물론이고, 교수님의 대학원 수업에 가서 온라인 설문지 작성법, 데이터 분석을 위한 통계 프로그램 사용법을 직접 가르쳐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국어교육과를 나왔는데, 정신 차려 보니 미쿡에서 영어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 설문지라고 해서 구글 폼 같은 사용자 친화적인(User-friendly) 프로그램을 상상하면 안 된다. 당시에는 드림위버와 콜드퓨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썼는데, 템플릿이 있다고는 해도 코드를 직접 보면서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웹페이지의 "소스 보기(show page source)"를 열어 그 페이지의 뼈대와 내장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때 처음 알았다. 나는 내 설문지 하나도 간신히 만드는 수준인데, 수업을 듣는 20여 명의 학생들이 저지르는 다양한 실수를 잡아내고 수정해 줘야 했다.
내가 수업하는 동안 big shot 교수님은 수렴청정하는 대비마마처럼 등 뒤에 앉아 계신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시다가 한 번씩 끼어들어 부연설명을 하신다. 게다가 미국 학생들은 질문도 잘한다. 수업 끝나고 숙제하다가도 모르는 거 있으면 이메일로 물어본다. 이 질문에 모두 답을 해줘야 한다. 당시 나는 돌쟁이 아이를 키우고 있었는데, 밤마다 왼팔에 아이를 받쳐 안고 수업 준비를 하고 학생들에게 이메일을 하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덕분에 내 왼팔에는 계란 특란 사이즈의 알통이 남아있다)
그렇게 오늘 배워 내일 남 주는 조교 일을 하는 동안 등줄기에 많은 땀이 흘렀다. "이렇게 전문성 없이 남을 가르쳐도 되나?" "내가 잘못 알고 잘못 가르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컸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분야는 워낙 새로운 분야여서 나보다 더 잘 알고 더 잘 가르칠 사람도 흔치 않았다. 그 시기 그 분야에서는 나처럼 열심히 빨리 배워서 다음 날 바로바로 가르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속도 경쟁이 중요한 분야에서는 철학이나 문학처럼 잘 익은 지식을 가르칠 수가 없다. 그래서 어제 배운 것을 오늘, 심지어 오늘 배운 것을 오늘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다.
조교로서, 강사로서,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지내온 세월이 많이 쌓였다. 조교 시절에는 나도 언젠가 '유유히 빈 손으로 나타나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수업이 되는' 그런 교수가 되기를 꿈꾸었다. 아쉽게도 그런 기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도 수업 준비는 전날 밤늦게까지 계속되고, 트렌드에 민감한 과목은 당일 아침에 강의록을 수정하기도 한다. 10년 전에 어땠다는 것보다는 내일 어떻게 될 것인가가 중요한 과목이 많으니 강의 준비는 언제나 진행 중이다.
요즘은 뭐니 뭐니 해도 AI가 핫하다. 얼떨결에 생성형 AI 활용 워크숍을 진행하게 되었다. Canva라는 어플을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매일 들여다보는데 매일 새롭고 배울 게 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지만, 남 주려고 배울 때는 학습 의지도 높고 효율도 높다. (이거 배워서 뭐에 써요?라는 수포자들의 질문이 끼어들 틈이 없다). 워크숍 당일 아침까지 수업 준비를 하다가 학생들을 만나겠지만, 20여 년 전처럼 등줄기에 땀이 흐르지는 않을 것 같다. 이런 건 다 배우면서 가르치는 거니까.
Canva로 생성한 이미지. 실제 내 모습보다 많이 많이 연로하신 모습이다. 게다가 백인이네요.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