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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부는 정말 평생 따라다닐까?

아직도 곱씹어 보는 담임 선생님 종합 의견

by 임시저장

방학 동안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생성형 AI 활용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더니, 생기부에 들어갈 내용을 몇 자 적어 달라고 한다. 어떤 학생은 더할 나위 없이 성실했고, 어떤 학생은 건성건성이었으니 똑같이 써 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평생을 따라다닐 기록에 나쁜 말을 쓸 수는 없어서 "완성도가 뛰어난 과제를 제출", "완성도 있는 과제를 제출," "과제를 제출" 하는 식으로 미세하게 차등을 두었다. 이번 가을에는 입시 업무에 동원되어 생기부 서류 평가를 하게 될 예정인데, 작성자가 숨겨둔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학창 시절에는 "생기부가 평생을 따라다닌다"고 하면 "에이 설마!" 했다. 생기부 내용이라고 해 봐야 출결, 성적, 신체 발달 상황, 특별 활동 정도여서 대단한 내용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에도 생기부는 대학 입시 때 제출되었는데, 한 글자 한 글자 학생들에게 공유되고 확인까지 받는 오늘날과는 달리 학생은 생기부에 접근할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막연히 어떤 내용이겠거니 생각만 했지 눈으로 확인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내 나이 마흔을 앞두고 고등학교 시절의 생기부를 확인할 일이 생겼다. 당시에 나는 미국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국으로 이직을 하면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사본을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덕분에 보게 된 생기부에는 학생 본인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두 가지 정보가 눈에 띄었는데,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측정한 아이큐였고 다른 하나는 담임 선생님의 종합의견이었다.


아이큐를 학생에게 비공개로 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아이큐 높다고 자만하는 것도 좋지 않고, 아이큐가 낮다고 포기하는 것은 더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요즘은 사설 전문기관에서 일찌감치 아이큐 테스트를 하고 영재 교육이 필요한지 확인해 본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너의 아이큐가 몇이라고 말해 주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어차피 영재 교육의 기회도 거의 없었고, 천재라고 해서 주목을 받았다가 괜한 시기 질투로 교우 관계가 틀어지거나 범죄의 타깃이 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담임 선생님의 종합의견을 비공개로 한 것 역시 현명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명인들의 어린 시절 생활기록부 내용을 보면, 선생님 좀 너무 하셨네요 싶은 것들도 많다. 예컨대, 코미디언 이경규는 "말이 많고 비협조적이다", "의욕 부족으로 학업에 진전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코요태 출신의 예능인 김종민은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럽다", "행동이 느리고 잘 다툰다", "담임과의 약속을 잘 어긴다"는 등의 솔직한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 구속되어 있는 전직 대통령의 초등학교 생기부도 인터넷에서 떠도는데,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어쨌든, 학생에게 한 글자 한 글자 다 확인받는 오늘날의 시스템이라면 선생님들이 이토록 솔직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코멘트를 남길 수 있겠는가? 추천서 문화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담임 선생님의 종합 의견은 큰 의미가 있다. 땅에 떨어진 교권을 다시 세우고 싶다면, 생기부의 담임 선생님 종합 의견을 비공개로 전환하는 방안도 검토해 보기 바란다.


내 생기부의 담임 선생님 종합 의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표현은 "어려움을 잘 극복함"이라는 여덟 글자였다.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하며, 교우관계가 원만한" 같은 식상한 표현에 비하면 정말 관심을 갖고 지켜보신 선생님만이 쓸 수 있는 표현 아닌가? 고등학교 3년 중 2년을 나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무척이나 나를 아껴주셨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창시절에 나는 항상 싱글벙글 웃으며 다녔는데, 선생님은 그런 나를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아이로 봐주신 것이다.


내가 이 생기부를 보게 된 시점은 마침 무척이나 힘든 시기였다. 타국에서 아이를 출산한 뒤 한 달 만에 대학원을 시작했고, 학업과 가정을 둘 다 놓치지 않으려고 9년째 고군분투하던 중이었다. 요즘 말로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한 거) 아니었으므로, 투정을 부릴 수도 없고 그저 눈물콧물 삼키며 발버둥 치던 때였다. 그 시점에 보게 된 이 여덟 글자는 마치 담임 선생님이 나를 위해 미리 적어두신 위로와 격려의 말씀 같았다.


"넌 어려움을 잘 극복하는 사람이야. 지금까지도 잘 이겨냈듯이 앞으로도 잘 이겨낼 거야."


감사하게도 생기부를 제출한 대학에 임용되어 지금까지도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다. 담임 선생님의 이 종합 의견이 인사위원들에게는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다. "아, 내가 이런 사람이었구나. 적어도 우리 선생님은 그렇게 봐주셨네."


내가 살아있는 한 앞으로도 어려움은 계속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어려움을 잘 극복함"이라는 선생님의 여덟 글자를 떠올리려고 한다. 이 정도면 생기부는 과연 평생 따라다니는 게 아닌가?


tempImagekDAeaU.heic 생기부 종합의견의 효과. Canva 생성 이미지(프롬프트: Two white eggs. One with a golden halo, the other with red hor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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