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예전에 드라마에서 보았던가.
그 이후에 생긴 좀 허무맹랑 웃긴 로망이 하나 있었다.
생일날 남편(로망으로는 연인)이 작은 선물상자를 하나 내민다.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어본다.
'상자가 작은 걸 보니 목걸이나 팔찌인가?'
리본을 풀고(꼭 리본이 있어야 한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자그마한 자동차키가 들어있다.
"자기야, 생일 축하해. 차는 집 앞에 있어."
밖으로 나가서 차문을 열어보니 차 트렁크 안에는 선물과 꽃이 가득하다.
나도 알고 있다.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꿈이란 거.
그래도 뭐 드라마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걸 보면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이 더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상상은 자유니까.
그리곤 올해 내 생일.
남편과 나는 철저히 서로가 원하는 선물을 준다.
깜짝 선물 따위는 연애 때부터 진작에 때려치웠다.
깜짝 놀라게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올해는 뭘 사줄까 물어보는 그의 말에 답이 안 나왔다.
정말로 사고 싶은 것이 없다. 미니멀리즘을 신봉하는 나에게 선물 따위는 가당찮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다.
"갖고 싶은 게 하나도 없는데, 정 뭔가 사주고 싶다면 차나 한 대 사줄래?"
평소 같으면 바로 꼬리를 내릴 텐데 이 남자가 이상하다. 갑자기 가격이나 한번 알아보겠다며 올해 산 본인 차 담당 딜러에게 연락을 해본단다.
이 쪼잔한 남자가 이럴 리가 없는데.
역시나 이 남자는 다 계산이 있었다.
기존에 타던 내 차를 중고로 팔고, 그 돈에다 본인이 아주 약간 돈을 보태서 차를 출고하면 나머지 할부는 내가 갚는 거란다.
이건 뭐지?
차를 사준다더니 돈은 내가 내네.
거기에다 중고차를 팔려고 하니 이것저것 서류도 보내야 하고 차도 정리해야 하고 바쁘다.
왜 저 인간은 손가락으로 카톡 몇 개 보내면 끝이고 나는 이렇게 땡볕에서 중고차 딜러와 가격협상을 해야 하는 거지?
이래저래 여차저차 새 차가 온단다.
차를 받고 아파트에 주차등록을 하고 이것저것 설정을 하고 결국 나만 바쁘다.
이건 아니다.
나의 로망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분명 상자 속에 차키만 넣어 주는 거였는데.
왜 나는 열심히 자동차 내부 비닐을 떼고 있으며, 알 수 없는 기능을 찾으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건지. 거기다 할부는 내 통장에서 나간다니. 열심히 회사에 다녀야 할 이유를 이렇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저 인간은 자꾸 자기가 차를 사줬다고 한다.
이보시오, 말은 바르게 하시오.
이건 차를 '사' 준 게 아니고 그냥 '알아봐' 준거라고 해야 할 것 같소.
순순히 차를 '알아봐'준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근무지 중 한 곳의 주차장이 SUV 차량을 주차하기 힘들어서 거기에 갈 때는 내 차를 가지고 갈 거라고 한다.
역시 다 속셈이 있었다.
이걸 생일선물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못 받았다고 해야 하나.
나도 내년에 남편 생일에 선물을 '알아만' 봐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