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이지만 반대표는 하고 싶습니다.

나중에 이불킥을 할지언정 어색한 순간은 싫어요.

by 트윈플레임

드디어 총회의 시즌이 돌아왔다.

이렇게 대면으로 하는 총회가 얼마만인가.

심지어 총회 패션에 대한 신문기사까지 나올 정도라니 다들 이 상황이 즐거운가 보다.

그렇지만 내 마음속에는 설레는 마음은 없고 그저 코로나 시기에 전학 간 학교에서 아는 엄마가 한 명도 없는 이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잘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본능만이 꿈틀댈 뿐이다.


"엄마들이 다 명품백을 매고 온다는데, 당신은 뭐 가지고 갈 거야? 돈 벌어서 마누라 명품백 좀 사줄걸 그랬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남편 등 뒤에다 이렇게 쏘아붙인다.

"나는 가방 안 가지고 갈 거야. 바로 코 앞인데 가방은 무슨."

이런 나에게 남편은 엄지 척을 날려준다. 돈 굳어서 좋겠수.




총회 당일 정말 가방 없이 핸드폰만 주머니에 넣고 가벼운 마음으로 팔랑팔랑 학교에 갔다. 6학년인 큰 아이 반은 가뿐히 패스하고 3학년 둘째 아이 반에 올인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어차피 고학년 엄마들은 학교를 잘 안 와서 만날 수도 없을 듯 하니 앞으로 오래 같이 학교 다닐 둘째 친구 엄마들이나 몇 명 사귀어볼 심산이다.

곧 학부모 면담이니 그때 선생님께는 인사를 드려야겠다. 스스로 계획적인 나를 칭찬하며 3층에 있는 둘째 아이 반을 찾았다.


3학년 둘째 반 학생수는 19명인데 그중 7명의 학부모가 참석했다.

학교가 서울 시내 치고는 매우 소박한 학생수를 자랑하는지라 엄마들이 대부분 서로 다 아는 눈치다. 다행히 처음 보는 나를 반가워해 주고 먼저 전화번호도 알려주고 단톡방에도 초대해 준다. 전학생 엄마를 따뜻하게 맞아주니 이렇게 눈물 나게 고마울 수가. 이때까지는 어서 총회 끝나고 엄마들이랑 커피나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학교 소개도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학급 운영 방안도 안내를 한 후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학부모 임원을 뽑는 시간.

사전에 미리 급식 모니터링 담당과 도서관 봉사 담당을 신청하신 분들이 있어서 필요한 인원수는 채웠는데 정작 반대표를 지원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한다. 그렇지, 반대표는 이름 자체로 부담이 있긴 하지.

그런데 설명을 들어보니 딱히 또 할 일은 없어 보인다. 어색한 시간도 싫은데 그냥 내가 한다고 할까.

불현듯 옛 추억이 떠오른다. 둘째 아이 1학년 때도 이런 어색한 시간이 싫어서 자진해서 반대표를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코로나 때여서 아무 모임이 없어서 편했는데.

내가 아무리 업무시간이 자유롭고 휴가도 눈치 안 보고 쓸 수 있지만 그래도 나름 워킹맘인데 대표가 가당키나 할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점점 선생님이 아무 말 대잔치를 시연하신다.

어쩌지. 선생님 좋은 분 같은데 도와드리고 싶네.


결국 이 주책맞은 손이 불쑥 올라간다.

"일 년에 두 번 학부모 회의만 참석하면 된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할게요."

내가 말을 해놓고도 뭔 소리인지. 아, 내가 반대표 하겠다고 한 거구나.


순간 선생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래, 수고하시는 선생님 잠깐이라도 웃게 해 드려야지.

이렇게 우리 반의 어색한 순간은 순식간에 마무리되고 즐거운 총회는 끝이 났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반대표 엄마 중에 학년 대표를 뽑아야 한단다.

우리 학교는 3학년에 두 반 밖에 없는데, 그럼 둘 중 하나라는 거네.

옆반 대표 엄마가 오길 기다렸는데 웬걸 옆반 담임 선생님이 오셔서 연락처만 전달해 주고 가신다.

이건 뭔 시츄에이숀? 옆반 대표 어머니는 이미 사라지셨다고 하고 또다시 우리 반 선생님 얼굴에는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뭐지. 나 또 선생님 구해야 하나.


학교도 작고 별로 해야 할 일도 없어 보이고 어차피 둘 중 하나였으니 내가 한다고 하고 이 상황을 끝내야겠다.

그저 나는 학부모 총회에 참석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잔다르크가 되는 기분인지 모르겠다.

아무 계획 없이 갔던 총회에서 반대표에 학년 대표에.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어쨌거나 총회 이후 교장선생님과의 간담회까지 마치고 나니 배가 고프다.

아주 찐하게 총회를 마치고 교문을 나서는데 아까 연락처를 교환한 엄마들이 학교 앞 커피숍에 있다고 잠깐 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래, 원래 내가 원한 게 이런 거였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누군가 해야 할 거 내가 조금 더 신경 쓰면 되겠지.

반대표고, 학년 대표고 이런 말들은 교문을 나서면서 다 잊어버렸다.


학교를 나서는데 아이들을 환영하는 플래카드 문구가 눈에 띈다.

'봄이 온 줄 알았는데 너희가 온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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