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다시 쓰는 마음 3
나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애착이 아니라 거의 집착 수준으로 가족에게 애정을 주면서 갈구를 동시에 하고는 했는데, 그중에서 내가 가장 애착을 갈구한 건, 애증으로 점철된 건 엄마와 막내 남동생이었다.
우리 집은 삼 남매로, 내가 큰 딸, 내 뒤로 둘째 ( 딸), 그 밑으로 마지막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진부하게도 아버지는 늘 폭력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사람으로부터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우리를 위해서 가장 노릇을 했던 건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글을 모른다.
요즘 세상에 글을 모르는 사람이 어딨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름을 겨우 쓰는 것도 아니라 그냥 글씨 흉내만 낼 정도 안다.
엄마의 과거도 고달픈 건, 아마도 어린 시절에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계셨고, 본인은 가족도 한 명 없이 홀로 살아야 했었던 과거를 지닌 사람이기에 그럴 거였다.
본인이 못 배운 탓에, 엄마는 늘 주눅 들어 있었고, 사실은 아빠와의 결혼도 마지못해서 했다는 소리를 종종 들으면서 컸던 K장녀인 나는, 엄마가 늘 불쌍했고, 내가 엄마 대신에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과 압박감이 대단했다.
나는 늘 어디서나 착하고 바르고 뭐든 하는 아이였어야 했는데, 개중에 사소한 거 하나라도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나는 늘 전전긍긍이었다.
세상이 두쪽 날 것처럼 잠도 못 자고, 뭐든 내 잘못인 것처럼 남의 눈치를 보고, 나보다 동생들이 먼저라서 양보하고 심지어는 엄마에게 조차도 내 몫의 것을 나눠주는 게 나에게는 당연한 일들이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철이 빨리 들었다고, 착하다고 하며 칭찬을 했지만, 나는 그 말에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내 안의 나는 웃지 못하고는 했다.
늘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서 살아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몇 번 해본 것처럼 했어야 했고, 실수라도 하면 그날은 하루 종일 아니 며칠은 우울해서 폭식도 하고, 울기도 하고, 화도 많이 냈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항상 가족이 중심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늘 화가 나 있는 상태였었던 것 같다. 아니 화가 나 있었다.
그 화는 대체로 남이 아닌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때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때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화에는 늘 후회가 동반되었다.
엄마는 항상 자신이 사라지면 나에게 동생들의 엄마라고 했었고, 나는 그 말 때문에 더더욱 동생들에게 잘해야 했고, 나에게는 덜 주고, 덜 하고, 더 힘들게 했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다른 친구들은 교재비며, 용돈에, 본인들이 사고 싶어 하는 물건들 위주로 사는 가 하면, 나는 늘, 엄마, 동생들 것을 먼저 샀었다.
그게 나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동생들과 엄마는 처음에는 고마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마움은 덜 하고, 당연한 것이 되어갈 무렵, 나는 조금 지쳤다.
정신이 지치자, 나는 육체의 무력감도 같이 왔었고, 1년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고, 오전에는 잠을 자고, 새벽에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삶을 살았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 시급이 당시에 2000원 정도였는데, 나는 딱 2000원을 받고, 1년을 일했다. 편의점은 바로 집 앞에 있었고, 새벽 시간대를 택한 건, 사람들이 싫어서였지만, 안타깝게도 10시부터 새벽 2시 언저리까지는 피크 타임이라는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손님들을 대하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고요함이 찾아왔다.
새벽의 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다.
편의점 카운터에 앉아서 나는 글을 쓰고는 했는데, 당시에 썼던 글들로 인해서 나에게 조금씩 안정이 찾아옴을 나는 느꼈고, 내 친구들이 가끔, 나를 찾아와 먹을 걸 주면서 말로는 할 수 없는 위로를 해주었던 까닭에,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정함 때문에 나는 또 나의 이 미칠듯한 우울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지만, 여전히 가족에 대한 집착은 계속되었다.
내가 가족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애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건, 나와 마찬가지의 장녀들 습성이기에 그렇다.
나는 내가 장녀이기에, 장녀들이 겪는 고통을 잘 안다.
뭐든 잘해야 한다는 압박도, 착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도, 무엇보다 가족 중에서 큰 오빠나, 아들들보다 더 단단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도.
우리가 단단하지 못하면, 모두들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말이다.
그때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이제야 조금 깨달았다.
가족과의 손절이 최우선이라는 것을.
손절이라는 단어가 다소 과격하고 무섭게 들릴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가족이 스스로의 길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가 그랬다.
장녀로서의 책임감으로 똘똘 뭉쳐서, 해주지 못함에 안달 난 인간들.
하지만 우리는 또 한편으로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됨을 말이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데, 가슴으로는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더 많은 것 같다.
지금 알았던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쩌면 더 빠르게 나 스스로의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고, 삶에 대한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 무엇보다 내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이를 더 먹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감정으로 연결된 가족들과의 손절이 어쩌면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말이다.
우리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건, 그만큼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서였다,
관공서에 가는 일부터 시작해서 작게는 동생들 학교에서 받아오는 통신문들 까지.
집안일에 관심 없으면서 폭력적인 아버지가 하지 않는 일까지.
그건 모두 내 몫이었다.
오죽했으면, 남동생의 통신문에 적을 글을, 당시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내가 했을까?
동사무소라도 가야 할 날이면, 엄마는 늘 나를 불렀고, 본인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에 뒤로 빠지고 나를 앞세워서 내가 적어야만 했던 것을.
나는 마냥 어렸지만, 그럼에도 늘 이런 일들을 항상 했었다.
하지만 동생들은 나이를 먹고, 이제 엄마 대신에 해줄 수 있는 일들이 많음에도, 여전히 나를 앞세운다.
내가 직장에 다닐 적에도, 어디 가야 할 적에도, 엄마의 일처리며, 다른 동생들의 일처리를 해주느라, 정작 내가 해야 할 일들은 뒷전으로 밀리기가 일쑤였던 거다.
그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기에, 나는 묵묵히 받아들였던 건데, 그들이 다 자라고 나서도, 본인들도 내가 해왔던 일들의 일부분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들은 절대로 내 일을 덜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