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다시 쓰는 마음 4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의사가 되어서 아프리카로 가서 그곳에서 아프고 다친 사람들을 고쳐주고, 그들과 함께 늙어 죽을 때까지 살다가, 나도 생을 마감하는 것.
나는 그런 삶을 꿈꾸었는데, 지금 글을 쓰는 걸, 보니 나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죽지 않고, 타국에 가서 죽기를 소망한다.
유병장수 100세 시대라고 부르는 대한민국에서, 홀로 살아가면서, 고독사를 할 가능성이 아마도 나만큼 확실한 인간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나는 문득 들었다.
작은 방 한 칸에서, 홀로 누워서 눈을 감았는데, 시체가 10개월 만에 발견되는 건, 내 입장에서는 조금 서글픈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사는 인생의 마지막에는 해외에 나가고 싶다고 열렬히 갈망하고, 반드시 해외로 나가서 죽어야지 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이곳, 대한민국이 아니라면, 나는 그 어디든 좋다고 말이다.
그리고 왠지 그 꿈은 이루어질 것 같다.
가족과의 손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내내 하는 데, 내가 끊어 낸 첫 번째는 남동생이었다.
남동생은 나와 6살 차이가 나는 데,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탓에, 나는 늘 그를 막둥이라고 부르며 귀여워했고, 실제로도 엄마처럼 내 모든 걸 다 내어주었다.
심지어 빚까지 져가며 그 아이가 하는 카페에 투자를 해주었는데, 나는 더 해주지 못해서 안달 나고, 미안해서 울기까지 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미안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부모도 아니었고, 나도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고, 오히려 내가 받은 거라고는 튼튼한 몸 하나로 버티면서 살았는데, 그 아이에게 해줘야 하는 그 어떤 책임감은 나에게는 없었던 건데, 나는 엄마 대신, 아빠 대신이라는 그 말에 묶여서 철저한 책임감으로 그 아이에게 모든 걸 다 해주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가 고마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깨달았다.
물론 고마워는 했을지도 모르지만,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라면 상대에게 해야 할 행동과 말투에서 달리 드러나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런 행동과 말투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고, 고맙긴 하지만 대단한 것 정도는 아니야 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내가 준 도움들은 내가 정작 필요로 할 때, 써야 할 때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월급 230원을 받는 직장인 인 내가 받을 수 있는 대출 한도가 있었는데,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할 때, 이미 써버렸으니 쓰지 못했고, 그 아이가 여자 친구랑 여기저기 놀러 다닐 적에, 나는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무던히도 열심히 일을 했다.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을 동생이 대신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누군가 대신한다고 해서, 내가 진정으로 행복할까?
내가 가질 수 있는 기회비용들을 다른 이가 하고 있는데, 내가 괜찮을 수 있을까?
친구들과 나를 아는 지인들은 나에게 병이 걸렸다고 말하고는 했었다.
“착한 병”
그건 불치병이라고. 어디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도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말이다.
그랬다.
나의 병명이 착한 병이라고 명명되면서, 나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을 걷는 거나 다름없었다, 발을 한 발짝씩 내딛으면, 계속해서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서, 나는 급기야는 내 몸이 가라앉는지도 모른 체, 그대로 질식사당해서 죽을 거였다.
그런데 어떻게 헤어 나왔냐고?
오랜 시간 끝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해야 할까?
나에게는 남들은 모르는 일정 선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게 가족들한테는 거의 무한대의 것이지만, 타인에게는 정확하게 적용되는 것이었다.
예의 없고, 무례하고, 상대가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바로 그를 끊어낸다.
휴대폰 번호도 지우고, 카톡에서 차단시키고, 심지어 SNS 계정도 언팔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본인이 아쉬우면 연락할 거야.”라고.
대개는 타인들에게 적용되는 거라서, 가족들에게는 그 적용이 어렵지만, 남동생에게 적용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아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 오만함에서 비롯된 거였다.
남동생은 나를 잘 안다고 말한다.
누나는 너무 쉬운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 아이가 과연, 나를 잘았던 걸까?
잘 알았다면 아마 내가 쌓아 놓고 있는, 그 아이의 무례함 데이터를 좀 더 빨리 눈치챘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내가 해준 게, 상대에게 당연한 게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손절이야 이제”
그 아이를 손절시키자, 나는 좀 더 자유로움을 느꼈다.
내가 했어야 했던 일들과 해야 할 일들, 하고 싶었던 일들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집 중속에서 나는 무한 자유를 느꼈다.
당연히 눈치를 보며 살았던 내 삶에서 처음 찾아온 자유였기에, 나는 빼앗기지 않으리라 굳은 다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