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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마음 5

나는 지망생

by 이순복

동생과의 손절을 하자, 주변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건,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막내 동생에게 더 못해줘서 안달 난 것처럼, 마치 동생이 아니라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손에서 놓지 않고, 놓으면 큰일이 나는 것처럼 살았는 데, 솔직히 가슴 한쪽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한 기분도 동시에 찾아왔다.


매일같이 무언가를 사서 들어가던 나의 손에는 책이 들려있고, 때로는 맨 주먹을 주머니에 넣고 들어가고, 아니면 편의점에 들려 맥주 4캔을 만원을 사서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고, 걷는 시간이 조금 늘어나고, 더 많이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마스크를 벗고 나는 아마 하루에 3시간 정도는 걸었을 거였다.


워낙에 걷는 걸 좋아하기도 했고, 걷는다는 일은 나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사물과 사람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고, 복잡함을 단순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직장과 2시간 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종종 걸어가고는 했는데, 근래에는 마스크를 차는 게 부담이 되기도 하고, 오래 걷기에는 또 무리가 있어 근거리를 걸어다니 고는 한다.

집에서 산까지 걸었던 기억도 있는 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막론하고, 아마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엄청나게 걸을 터였다.


걸으면서 나는 내가 해왔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하면서, 다가올 미래에 닥칠 불안감과 목표를 다시 설정하고는 한다.


어린 시절, 아주 아주 어렸던 그 시절에 꿈꾸었던 의사라는 꿈이 무너지고, 나는 10년을 겨우 살아왔던 느낌이었다. 다른 이에게 해주는 말은, 실은 나에게 하는 말이었는데, 할 수 있어라든가, 되든 안되든 간에 해보지 라든가 하는 말이 특히나 그랬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에게 해주는 그 조언은 실은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은 드라마 작가가 되어서 일일 연속극을 쓰는 게 목표인데, 글을 쓴 지 10년 동안 결과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다. 현재도 계속해서 망생이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지망생...


지망생이라는 타이틀을 38살인 현재까지 달고 있으니, 어쩌면 나는 가장 오래된 지망생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실은 드라마 판에서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지망생들도 많으시고, 어린 분들도 계셔서, 딱히 부끄럽거나 창피하지는 않지만, 어디 가서 나는 내가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다.


대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작품에 대해서 물어보거나 경력에 대해서 꺼내는 데, 나는 내 작품도 경력도 없는 망생이.


초반에 운이 아주 조금 좋아서 KBS나 스토리 공모 대전에 최종심까지 간 적이 있는 데, 생각해보면, 그때로부터 딱 10년 동안, 내가 줄곧 글만 써온 것도 아니었고, 아마 10년 중에 7년은 먹고 사느라 바빠서 글은 뒤로 하고, 대충 적은걸 공모전에 내놓고는 했었다.


나는 이게 조금 창피하다.


친한 사람들에게 나는 글을 쓴다고 말하지만, ( 아주 극소수에게)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지만, 실은 나는 내 주제와 분수대로 쓰고 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안다.

글 보다 먹는 게 먼저라서 일단 돈을 벌어야 하는 삶이 최우선이었고, 돈을 벌면, 나를 위해서 쓰기보다 가족을 위해서 먼저 쓰는 게 그다음이었고, 다음은 공과금을 내고, 경조사비를 내고 , 카드값을 내고 나면, 나는 늘 빚에 허덕인다.


지금도 빚이 엄청나게 많기는 하다.


예전에 나는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가? 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고, 아직도 그 고민에 대한 답은 내리지 못했는 데,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의 1화, 혹은 2화 어느 장면에서 동훈이 은행 ATM 기계에서 돈을 뽑는 장면이 나오는 데, 잔액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아서 ( 나와 비슷한 잔액...) 위로받은 적이 있는데, 저렇게 좋은 회사에 다니면서 형과 동생을 도와주고, 유학 간 아들 뒷바라지를 하고, 변호사가 아내를 외조했던 동훈에게서 나는 나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 인 것 같다.

자신은 다 떨어진 옷을 입으면서 결혼을 앞둔 조카 결혼식에 가야 되는 큰 형에게 양복을 맞춰주는 모습을 보면서, 잔고가 얼마 있지도 않음서, 그 얼마 있지도 않은 잔고까지 탈탈 털어서 형에게 주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를 생각했다.


얼마 전, 나는 한국 방송 작가 교육원 기초반에 등록을 했는데, 등록금이 70만 원이었다.

6개월 과정에 70만 원...

거기다 신용카드도 되는 70만 원...


10년 전에 내가 만약 나의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고, 이 얼마 되지 않은 70만 원을 나에게 썼다면,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나는 포기를 하든가, 도전을 하든가 둘 중 하나의 삶을 살면서 덜 억울할 것 같았는데, 막상 합격을 하고 등록금 70만 원을 내고 보니, 억울함이 앞섰다.


동생이 카페일을 한다고 했을 때, 2300만 원이라는 돈을 빚을 내서 주었고, 퇴직금을 털어서 차를 샀지만, 정작 나는 운전하지 않고, 동생에게 주었고, 이사를 가기 위해서 모은 300만 원을 엄마에게 주었는데, 그건 홀랑 사라졌고, 다시 이사 자금은 내가 다니던 쌀 국숫집 사장님께 내 월급에서 60만 원씩을 주면서 갚기로 약속한 다음에 300만 원을 빌렸었다.


당시에 내 월급이 210만 원이었고, 엄마 휴대폰 비와 내 휴대폰비며 집의 공과금과 빚은 모두 내가 갚았는데, 남은 150으로 나는 생활이 될 리가 있었을까?


그럼에도 살았었는데, 70만 원이 뭐라고 나는 10년이 지난 지금에야 교육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걸까?


지금 알았던 걸,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제는 보조 작가로도 써주지 않는 내 나이를 탓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했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이 나를 붙들었다.


합격의 기쁨보다 억울함과 슬픔이 좀 더 나를 괴롭혔고, 나는 다음 손절 상대를 엄마로 정했다.


엄마를 끊어내기 위해서 아주 시간이 천천히 조금 많이 걸릴 테지만, 앞으로 나 스스로가 나와의 관계가 좋아지기 위해서는 나는 반드시 끊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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