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의 손절은 천천히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엄마가 없으면 내가 엄마라는 걸 강조하고는 했다.
그게 얼마나 폭력적이고, 아픈 말인지, 이제는 알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고, 그래서 동생들에게 진짜로 엄마처럼 내 것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주었다.
엄마가 글을 모른다는 건, 큰 자식인 내가 좀 더 빨리 세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고, 나는 세상을 아는 척만 하는 몸만 큰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도 이제는 안다.
이 몸만 큰 나는, 엄마와 항상 부딪힌다.
그 부딪힘의 정도는 늘 그렇듯 감정이 상할 정도고, 때로는 나에게 죽음을 꿈꾸게 만들었다.
동생들과의 문제도 문제였지만, 대부분의 큰 딸들이 겪는 엄마와의 이슈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몰아가게 만든다는 데 더 큰 원인 제공을 하는 것에 있다.
막중한 책임감과 조금만 덜해주거나 못해주어도 쏟아지는 원망 그리고 우리가 하는 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그 파렴치한 마음들로 인해서, 나 또한 늘 아픈 사람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엄마에게 나는 늘 해주는 사람이었고, 엄마는 엄마 자신의 삶이 버겁고,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로 나를 옭아매거나 정당화시키지만, 방법은 늘 존재한다는 것을 이제야 나는 안다.
다만 엄마의 그 자존심이, 자신에게 하나 남은 자존심이 문제였다는 것도.
엄마는 자신이 글을 모른다는 걸, 세상이 아는 게 부끄럽다고 그랬다.
한글 학원을 다니는 게 어떻겠냐는 나의 말에 그곳에 가서 무시를 당하라는 거냐는 말로 나를 기함 게 만들었고, 실업 급여를 6개월 동안 받으며, 그 아까운 시간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집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마치 내일이라도 당장 죽을 사람처럼 굴고는 했다.
자신은 곧 죽기 때문에, 오늘 쓰는 이 돈이 무용지물이 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비에 관해서도 굉장히 심각한 문제에 처해 있었다.
길을 가다가 싼 가방이 있으면 엄마는 그게 얼마가 되었든지 간에, 짝퉁인 그 가방을 10만 원, 혹은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라도 샀다. 언제쯤부터 엄마의 휴대폰으로 “ 어디 어디인데, 외상값을 갚으라”는 문자가 오고는 했는데, 그 문자 말고도 엄마는 비싼 화장품에 돈을 쓰면서도 항상 자신은 자식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말로 포장을 하고는 했다.
나는 그게 너무 화가 났다.
엄마의 방에 있는 내 책상 ( 이제는 쓰지 않는) 아래는, 엄마가 산 짝퉁 가방들이 일렬로 서 있고, 엄마의 서랍장에는 지갑들이 쭉 나열되어 있으면, 화장품 대에는 100만 원이 호가하는 비싼 방문 판매용 화장품도 더러 있었다.
그래 놓고, 나에게는 자신이 돈이 없으니, 택시비 있냐고 묻고, 커피 한잔 값에도 아까워서 벌벌 떠는 모습에, 내일 죽으면 어차피 외상값 안 갚아도 된다는 식의 이상한 말을 하고는 했다.
이 사실은 내가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동생들에게 터뜨렸는데, 엄마는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동생들도 본인들이 어떻게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엄마를 그렇게 만든 거 “나”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래, 아무도 하라고 하지 않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마치 트라우마처럼 혹은 가스 라이팅을 당한 사람처럼, 책임감과 의무감에 매달린 내가 또 잘못인 모양이었다.
엄마의 소비 패턴은 늘 그랬다.
정확하게 무언갈 사야 한다면 그 물건에 대한 필요성과 가격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사는 게 맞는데, 엄마는 10만 원짜리 짝퉁을 사면서 대리 만족을 하는 거였다.
그리고 그건 아빠가 죽고 나서 더 심해졌었다.
이사를 가기 위해서 모아둔 300을, 보증금으로 걸으라고 준 300을 엄마는 그걸로 코트를 사고 화장품을 샀었다.
그때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자식이 한 달에 60만 원씩 5개월을 모아서 준 돈을 그런 곳에 쓰는 엄마의 이야기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새엄마나 할 법한 일있은데 라는 생각에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상한 생각은 대개 맞는 법이었고, 엄마는 그렇게 돈 이 없다고, 사라졌다고, 자신이 아파서 썼다고 수술을 받았다는 거짓말로 둘러댔다.
그걸로 내가 길길이 날 뛰자, 돈 300을 가지고 유세를 떨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말하고, 동생은 나에게 잊으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나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동생은 본인이 군대 가기 전에 돈 70으로 세탁기를 사준 걸 아직도 이야기하면서, 나에게는 잊으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쩌면 나의 이 미련하고 멍청할 정도로 가족들을 생각하는 이 천치 같음이 차라리 그때 뒤통수를 맞은 날 정신을 차렸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큰 딸이라는 이유 만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 사람들에게 나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서 죽음을 생각했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먼저 죽어서 슬프게 만들고 싶다고, 유서 속에 당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서 욕을 하고 손가락질을 당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그 어리고 어리석은 생각은 잘못된 것임을 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나는 천천히 시간이 걸렸지만, 내 세상을 찾아가고, 무너진 것을 보수하고 땜빵하며, 멘털을 하나하나 모아서 다시 만들고 있음을 말이다.
전에 내 멘털이 바다에 있는 모래사장이었다면 지금의 내 멘털은 두바이에 있는 고층 빌딩이다. 아래는 지진 설계도 되어 있어서, 지진이 오면 지진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회오리가 치면 회오리가 치는 대로, 그대로 받아내면서, 이겨내고는 한다.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천천히 발 빼기에 있었다.
엄마의 소비 패턴을 엄마의 문제로 인식하고, 내가 고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건 엄마의 문제이므로,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언젠가 그 문제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건 내가 아니라 엄마가 될 거였고, 모진 말로 나를 대했던 엄마가 나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며 자신의 상황과 문제를 다시금 나에게 떠 안기려고 할 때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나 자신을 연습시켰다.
머릿속에서 그 연습을 하면, 나는 가슴이 떨릴 정도로 두근 거리지만, 한 해 두해 그렇게 해나가다 보니, 이제는 엄마에게 “NO”라는 말을 잘할 수 있게 되었고, “거절”이라는 단어를 마음속에 품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거절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냉정하고 나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거절은 나쁜 게 아니라, 당연히 해야 될 행동이라는 것을 공부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안 하는 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구분지어서 나에게 인지를 시키면, 그 일을 맞닥뜨렸을 때, 나는 내가 인지해오던 것을 그대로 내뱉는 것.
그게 바로 엄마와의 관계에서 내가 천천히 나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게 된 첫 번째 노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