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1. 어느 날 갑자기

part 1.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 - 인디언 속담-

by 이순복

chapter1. 어느 날 갑자기

뭐든 우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인디언 속담에 따르면 “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그 말에 100% 동감하고, 공감하며, 찬성한다.

내가 잘 다니던 직장을, 월급은 또래가 받는 것에 비하면 훨씬 적고, 삶의 질은 엉망이고- 16시 출근, 새벽 1시에 퇴근하는 중화요리 술집의 주방에서의 삶- , 무엇보다 어쩌면 이 직장이 아니면 다른 직장을 들어가기 절대적으로 힘들 거라는 확신- 어리지 않은 나이, 남들보다 많은 나이, 무얼 하기에 두려운 나이 서른 후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만둔 건, 그 일 또한 그렇게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을 그만 둘 때는 이렇게까지 큰 일을 벌일 줄은 절대로 상상 조차 못했던 건 비밀도 아니고...

사실 쫄보의 삶을 살았던 나에게, 무언가를 그만두고,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건 꽤나 용기 있는 일이었다. 키 174인 나는 언제가 시선은 아래로, 어깨는 조금 굽히고, 걸음걸이는 천천히, 하지만 양 손의 주먹은 귤 하나를 쥔 것처럼 걷고는 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늘 나보다 잘난 사람들 천지 삐까리였고, 나보다 앞서 나가는 사람들 또한 지천에 잡초처럼 널려 있었으며, 무엇보다 우월한 그들의 사이에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5천만 인구 중 가장 보잘것없는, 가장 힘없는, 누구보다 할 일 없는 그런 존재처럼 나를 대해 오고는 했다.

무얼 하든 간에, 남 앞에서는 잘할 거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주었지만, 나에 대한 자신감은 늘 바닥에 딱 붙어서, 도약을 하지도 못하면서 저 높은 우물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이 보였던 우물 안 개구리.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내가, 퇴사라니...!! 대학 졸업장도 없고, 고졸인 내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짬뽕 속을 볶고, 짜장면을 만들고, 육수를 만들면서, 볶음밥을 기깔나게 볶을 줄만 알았던 내가 퇴사라니...!

나는 속으로 다시 나를 불신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다시 한다고 할까?”라고.

하지만 자존심이 문제였다.

한번 나간다고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다고 하는 건, 내가 사는 내내 나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그 오똑하고, 또렷하고, 뾰족한 자존심이 절대로 허락을 하지 않았다.

만약 다시 한다고 했을 때도, 문제였다.

이미 후임자는 정해졌고, 나만의 논리 정연한 말로, 마치 어른이 된 것 마냥 떠들었는 데...... 그런 내가 다시 그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문제점들.

적은 나이도 나이고, 서른 후반인 내가, 고졸인 내가, 남들보다 가방끈이 짧은 내가, 이쁘지도 않고, 키만 큰 내가, 날씬하지 않은 떡대가 좋은 내가, 그래도 손맛은 좋고, 손만 댔다 하면 맛있어지는 손을 가진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인, 아니 잘한다고 여기는 일인 요리를 손에서 놓고, 과연 다른 일을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편히 있어야 할 방안까지 따라 들어와서 길게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건 잠을 자는 내 꿈속에서도 찾아와 나는 내내 불면에 시달려야 했는데, 그때 오만가지 안 좋은 꿈이란 꿈은 다 꿨다.

그래서일까? 늘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아팠다.

그건 아마도 겪어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내가 해보지 않은 일에 대한 중압감, 새로운 일을 맞이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낯선 것에 대한 아주 작은 양의 기대가 버무려져서, 이도 저도 아닌 맛을 냈지만, 나는 어쨌든 그만 두기로 했다.

어떤 일은 내가 하지 않아도 일어나고, 또 어떤 일은 내가 해야만 일어나기도 하는 데.

이건 내가 해야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생각해보면, 요리를 할 때는 기분이 좋았던 것 같다.

맛있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 머릿속의 상념이 다 사라졌고, 중식도로 칼질을 와다다다- 할 적이면, 그 리듬에 심장이 마구 뛰었고, 누군가 내가 만든 음식이 맛있다고 칭찬이라도 해주면,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내가 만드는, 혹은 다른 이가 만들어 주는 기쁨이었는 데, 생각해보면, 나는 태어나서부터 칭찬을 박하게 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여서 그런 사소한 것에 더 많은 만족을 느꼈던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어린 시절,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고, 국어에서만 4개를 틀린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온 일이 있었다. 나의 아빠는, 아니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것도 틀렸냐며 타박을 해댔고, 우락부락한 얼굴로 입술은 뾰족하게 해 둔 체로,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을 잔뜩 날이 세워가며 말을 했었다. 초등학생이, 그것도 첫 시험에서 국어만 4개를 틀리고 나머지 과목은 올 만점이었는 데...... 칭찬이 아닌 타박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타박은 내내 이어졌다.

무언가 조금만 잘못해도 불호령이 떨어졌고, 내가 잘못하지 않은 일임에도 나는 맞아야 했고, 동생이 실수를 하면 그것 또한 내 실수였고, 동생이 다치기라도 하면 그것 또한 내 잘못 이었다.

그럴 때마다 손이, 빗자루가, 걸레가 내 온몸에 날아들었다.

막아주는 어른은 없었다.

엄마도 아버지의 손바닥에 맞았으니까.

그래서일까? 나는 누군가 나를 칭찬해주면 그렇게 몸이 달아오를 수가 없다. 그건 좋아서 달아오르는 게 아니라, 혹시나 이 칭찬이 나중에 나에게 독이 될까 두려워 그러는 거였다.

지금은 이 사람이 나를 칭찬하고 잘한다 잘한다 해주어도, 어쩌면, 내가 아주 작은 실수를 한다면, 이 칭찬은 나의 등에 반드시 칼을 꽂고 말 거라는 아주 무서운 생각들을 나는 종종 한다.

어린 시절의 박했던 칭찬은, 오히려 늘 혼나는 쪽이었던 나는, 늘 남들의 눈치를 봤었다. 그게 몸에 익어서 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들어가게 된 28살의 첫 번째 직장에서 나는 칭찬에 아주 박한 점장님이 되어 있었다.

‘ 점장님은 칭찬을 너무 안 해’라고 말해준 건, 내 남동생이었다.

그때 그곳에서 남동생이 잠깐 아르바이트를 했었는 데, 나는 나이도 많았고, 직급도 있어서 어린 친구들, 나보다 8살, 9살 많게는 띠동갑인 친구들 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은 나보다 훨씬 어렸으니 그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었는 데,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남동생은 나에게 와서 그런 말을 했었다.

“ 누나는 칭찬을 너무 안 한대”라고.

그 순간 나는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맞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데. ( 당시에 이 책이 유행이었다!)

내가 너무 야박한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속으로 뜨악하고 말았다.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의 세상에서는 아니 어쩌면 내 세상이 아닌 곳에서는 내내 해왔던 당연한 것들인데.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고, 자신만의 세상이 강해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어떻게 보면 칭찬에 중독된 사람인 것 마냥, 다른 사람들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나는 스스로 내 칭찬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긴 한데,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다.

스스로가 잘했을 때는 반드시 칭찬을 해주고, 박수를 쳐주고, 잘했다고 마음속으로라도 응원을 건네야 한다는 것.

칭찬에 박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살다 보니, 혹은 나이를 먹을수록 칭찬을 해주는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보니, 나 스스로 라도 나를 위해서 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날이 온 것이었다!

그렇게 나도 서른이 넘어서야 누군가를 진심으로 칭찬해주는 방법을 터득했는 데, 그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해보지 않으면 해 보면 된다, 안 해보지 않은 일이라도, 스스로 기꺼이 나아가게 되면 조금은 해볼 수 있고, 어쩌면 다른 것도 할 수 있게 되는 좋은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하지만 처음 직장이었던 곳을 그만두고, 나는 다시 나의 자존감도, 자신감도 바닥을 쳤다.

주변은 늘 아픈 사람들로 넘쳐났고, 진부한 나의 클리셰는 늘 나를 따라다녔다.

어쩌면 그 진부한 클리셰를 만든 건 나였고, 내내 후회가 되는 건 변화하려면 어쨌든 맨 주먹이라도 불끈 쥐어야 하는, 허공에 삿대질이라도 해야 하는 미친년이 되어야 했었는데.


나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되도 않는 말에 넘어가 이상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사기 아닌 사기 같은 일에 휘말려 나는 작은 쌀국수 집을 바지 사장으로 넘겨 받았지만, 월세가 나의 월급보다 많았고, 관리비는 나의 한달 생활비 보다 높았으며, 무엇보다 출근퇴근 2시간, 엄마와의 잦은 다툼,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불안감의 엄습이 나의 온 몸을 휘감으며 핏줄 안에 내재 된 도망쳐 라는 문구가 내 관절 마디와 심장안을 휘젓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랑방 신문이라는 곳에서 도장, 방수, 미장, 타일이라는 이 네 단어를 보게 되었다.

검색을 해보니, 전문가가 되면 엄청난 돈을 벌 수도 있는 직업이었다.

소위 말하는 막일라는 단어는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그즈음에 나는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지푸라기도 필요한 시점이었다는 게 냉정한 판단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첫 번째 돈 안 드는 학원

두 번째 돈이 안 드는 데 돈을 주는 학원

세 번째 기술을 익히는 데 앞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종


이 세 가지를 찾아 아야 했는 데, 그게 바로 타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타일공은 5년차부터는 일당 30이상이다!!


하지만 막상 학원에 가보니, 문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 거였다.

집에서 학원엘 가려면, 40분이 걸렸다.

아침과 늦은 오후에 40분씩 80분을 길바닥에 버려야 한다는 생각, 돈을 벌지 않으면, 당장에 생계에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걱정, 영락없이 점심을 굶어야 그나마 식대라도 아낀다는 심정에 가득 차 있었는 데, 그때 나이는 34살이었다.!!


34살, 나의 통장의 잔고는 500만 원이었고, 그 500만 원 마저도 직전의 일을 그만두기 전에 겨우 겨우 카드론으로 빌린 대출이었다. 그리고 일을 그만둠으로써 받는 실업자 급여를 나는 받을 수 있었다. 그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고, 한 달에 140만 원 정도를 받을 수 있어서, 다른 빚을 함께 갚고 나면, 6개월은 여차저차 해서 학원에 다닐 수 있을 거라는 계산도 했었는 데.


무엇보다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던 건, 문 앞에 섰을 때 나는 그 특유의 시멘트 냄새가 나를 먼저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인간이 기억에 가장 오래 남게 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냄새라고 하는 데.


그 냄새는 여전히 기억이 난다.

공사장 앞을 지날 적이면 맡을 수 있는 그 특유의 냄새들... ...

먼지가 한 가득이고, 시멘트를 물에 비비면 나는 그 냄새들... ...

8층짜리 건물중 2층만 사용하는 직업 학교의 시멘트 냄새가 온 건물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


5월의 어느 날, 나는 청바지에, 반팔 그리고 백팩을 메고, 긴 머리를 싹둑 자른 숏 컷과 단발의 중간의 머리카락을 하고서 직업학교의 복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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