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3. 미장 시험 과 타일 반 그리고 나 1.
결전의 날 심장이 많이 두근 거리지는 않았다.
어려울 테고, 어려울 것이고, 그리고 나는 처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떨어져도 혹은 붙어도 슬프거나 기쁘거나 당황 스럽거나 설레거나 하는 그런 감정은 하나도 들지 않는게 신기할 정도 였다.
다만, 나를 위해서 자신의 본업도 쉬면서 경기도 안성까지 함께 올라가 준 동생이 고마울 따름 이었다.
두 군데의 시험장 중에서 안성에서 시험을 치르기로 한 나는, 가장 가벼운 차림으로, 소위 말하는 일복을 입고, 집 근처 만물상에서 빌린 믹싱기와 내 장비를 트렁크에 싣고서 아주 짧은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차에 올랐다.
새벽 4시에 출발한 우리는, 아침 8시 30분에 시험에 안전하게 도착을 했고, 새벽 바람을 맞으면서 휴게소에 들러서 라면과 김밥도 먹고,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진짜로 여행을 간 기분으로 그곳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찌기 시작한 날씨 때문에 나는 벌써부터 머리에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갈길은 멀었다. 수험표를 가슴에 붙이고, 신발은 안전화에 바지는 냉장고 바지, 티는 검은 색 반팔티를 입고 손에는 통풍도 안되는 작업용 장갑을 끼고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도 미리 다녀오고, 바깥에서 시험관들과 인사를 하고, 시험은 정확하게 9시에 시작 되었다. 그러나 시작 되기 전, 미리 만난 같은 운명 공동체인 수험자들은 나만 빼고 모두 남성분들 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들 현장에서 적게는 8년, 많게는 10년 이상을 몸을 담그고 있었던 분들 이었고, 전라도에서 온 나는 한 명뿐인 데다가, 모두들 인천과 서울 경기 쪽에서 오신 분들 이기도 했다.
게다가 방수와 도장에 다른 현장 자격증만 서너개씩 가지고 있는 베테랑도 있었고, 자격증보다는 세월이 말해주는 실력을 가진 분도 계셔서 그분들 때문에 살짝 쫄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나 혼자!
유일하게 여자 혼자 당당하게 미장 시험을 보러 안성까지 온 나도 질 수는 없었다.
미장 시험은 거의 6시간 정도를 밖에서 진행하는 데, 떨어지고 붙고 보다 버티느냐 못 버티느냐의 문제가 더 큰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땡볕에서 무조건 끝까지 버텨보자. 그게 오늘 하루 미션이야!!’ 라고.
시험을 치루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온통 그동안 연습했던 미장 벽 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
연습때와 다른 온도, 다른 환경,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질감의 시멘트는 나를 당황과 당혹의 끝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시멘트를 개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 모든 건 내가 연습했던 환경과는 너무 다른 것 이라서 나는 당황 할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미끄러웠다.
바닷가의 고운 모래가 섞인 거라면서 시험 용 모래와는 다른 거라고 누군가 이야기 하는 걸 들었는 데... 그게 진짜일 줄이야.
게다가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꼼수 중 하나인 벽에 접착이 잘되는 용액을 타야 하는 데, 그걸 타다가 걸리면 실격 이란다!
안 걸릴 수 없지. 그렇게 훤하게 사방이 트인 곳인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주어진 환경 대고, 주어진 모래로 발라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리고, 게다가 벽은 쩍쩍 갈라기고,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가고, 톱으로 미리 손질해둔 나무는 사용 하지 말라고 윽박 지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울며 겨자 먹기로, 새로 톱질을 하고, 시간은 그렇게 20분을 남겨 두었을 때!!
현장을 둘러보니, 남은 사람은 10명에서 5명으로 줄어 있었다.
현장에 계셨던 분들에게도 미장 시험은 최상의 난이도 였고, 설사 남았다고 하더라도, 합격을 하기가 어렵다는 말이 진짜 였구나..를 새삼 온 몸으로 체감하는 중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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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와중에 거의 다 완성한 나의 벽이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20분을 남겨두고!!
그래, 나는 떨어졌다.
떨어지고 주변을 보니, 채점을 시작한 시험관들이 고개를 젓는 게 보였다.
하지만 뭐 어때? 내가 떨어진다고 해서, 내 자존감까지 떨어지는 건 아니야!
나는 처음이고, 경력 10년 들과 대등하게 붙어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어!
라고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고, 내 물건을 주섬 주섬 챙겨서 시험장 한 켠에 세워둔 동생의 차로 왔을 때, 동생은 눈물나게도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 고생했네, 누나. 잘했어.” 라고.
진짜로 하마터면 울뻔 했다.
시험에 떨어져서 슬픈게 아니라. 나의 2개월 하고 10일에 대한 칭찬을 받은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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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주 사소한 말 한마디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고 나는 믿는다. 말의 힘은 아주 큰 것 이라서, 그 말에 담긴 언어의 힘을 믿는 거였다.
‘언령’ 이라고도 하던가?
말은 내뱉은 만큼, 그 사람의 정신과 혹은 마음과 연결 되어 있다.
그 연결된 정신과 마음이 겉으로 표현 되는 게 첫 번째가 마음이고, 두 번째가 눈빛, 세 번째가 표정 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우리 막내 동생은 그 세 개를 모두 있는 힘을 다해서 큰 누나인 나를 응원했던 거였다.
그래서 일까?
나는 원래 실패를 두려워서 도전도 안하는 사람 이었다.
10대때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해서 1년을 더 공부를 해야 했을 때였고, 20대 때는 남들은 다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집의 보증금 때문에 내 대학 등록금을 빼야 했었던 기억들 때문에 나는 무언가를 시도를 안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크고 작은 무시와 경멸들이 그것에 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예쁘지 않은 아이, 몸집이 크고 뚱뚱한 아이, 머리가 심한 곱슬이라서 매직을 할 적이면 거의 양탄자 하나를 머리에 얹고 다니는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외모에 대힌 비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는 가족들에게.
나는 찌그러 지고 또 찌그러져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도전을 한 건, 인생에 큰 터닝 포인트 라기 보다는, 요즘 세대의 거창한 의지라든가 혹은 청춘 에세이에 나올 법한 멋진 언어들을 읽고 라기 보다는 나 스스로의 변화였다.
어느 날 문득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이 오는 것 같다.
“ 이게 마지막이야” 라는 생각
그리고 그 마지막이 조금 후회가 덜했으면 하는 바람.
그런 소소하고 사소한 것들이 결집 되면, 사람은 변할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살, 우울증, 21세기가 나은 병들이라고 하지만, 자살과 우울증은 20세기에도 19세기도 그보다 더 오래 전에도 존재하고 있었고, 모두들 안 좋은 방향으로, 결코 좋지 않은 방향으로 늘 결말을 맺었다.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 세상에서 마치 나는 없는 것 같은 마음,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일까? 하는 제로 포인트의 마음.
나는 그 마음을 잘 안다.
진부한 클리셰를 가진 내가 바로 당신들과 같은 사람 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지금의 삶이 거창하거나 대단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빚이 많고, 현실적으로 해결 해야 할 일들이 달마다, 날마다, 시간마다 돌아오는 중이다.
다람쥐가 열심히 쳇바퀴를 돌면 주인한테 간식이라도 얻어먹지만, 나의 삶은 열심히 바퀴를 굴려도 여전히 마이너스의 지점에 있는 건 분명하다.
여러분의 삶도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죽고 싶다는 마음, 때로는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 아무도 몰라준다고 여기는 가련하고 가엾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 하루에도 열두번씩, 24시간 내내 시간과 분단위 혹은 초단위로 모두를 괴롭힌다.
나도 그렇다.
그러나, 진부하지만, 아주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으면 당신도 할 수 있다.
당신이 하면 나도 한다.
나는 미장을 하면서 이런 삶의 어떤 목표치를 깨달으면서 그리고 때로는 내가 안주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 환경을 바꾸면 다른 무언가가 마음속으로 저벅 저벅하고 걸어들어오는 경우도 왕왕있다.
게다가 내가 한 경험은 그야말로 가성비값의 경험이 아닌가?
직업 학교는 한달에 식대와 교통비를 실업자들에게 지원을 한다.
자격증도 따게 해주고, 돈도 주는 학원.
1석2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그런 곳이 바로 직업 학교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칭찬을 야박하게 들었던 나는 칭찬을 박하게 하는 자린고비가 되었지만, 미장을 하면서, 나는 누구보다 칭찬을 많이 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다른 이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어떤 날은 이게 칭찬을 들을 만한 말인가? 싶을 때도 있고, 어쩔때는 나를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지만, 함께 미장을 배운 선생님들 ( 학원에서는 모두가 선생님이다. 나도 마찬가지다!!)은 나를 늘 하늘로 올라갈 정도로 칭찬을 해주었다.
“ 선생님은 어쩌다 여길 왔어? 젊은 사람이? 대단하네 정말”
“ 선생님은 이길로 계속 갈거야? 가면 잘할 것 같은데, 어때? 나중에 나랑 일해볼래?”
“ 선생님은 아니면 자기집이라도 손으로 고칠 수 있잖아? 우리 자식들은 내 손만 쳐다보는데”
라든가 등등.
그분들에게 나는 자식이었고, 동료 였고, 혹은 자신들보다 훌륭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분들이 존경 스럽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그분들을 마음속으로 응원한다.
미장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날은 통장 잔고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내가, 동생과 엄마에게 집 앞에서 삼겹살과 소맥을 쐈다.
아주 맛있는 밥 이었고, 아주 즐거운 식사 자리였다.
비록 탈락 했지만!
다음 날, 다시 짐을 바리 바리 싸들고, 학원에 가니, 선생님들 모두가 고생했다며, 초코파이며, 커피를 주셨다. 괜찮다고, 떨어지면 어떠냐고, 내년에 다시 보면 된다고. 처음 한 것 치고는 잘했다고, 그러니 내년에 다시 보자고.
타일 반 선생님은 나에게 자신과 함께 내년에 준비해서 같이 가자고 말씀해주셨고, 미장 반 호랑이 선생님은 나에게 잘했다며, 칭찬을 내내 해주셔서, 떨어진 사람치고는 괜찮은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드디어 타일반으로 옮겨갈 자리가 생겼다.
여석이 생기면 바로 타일반 선생님께서 넣어주신다고 했는데, 그동안 내가 미장반에서 열심히 한 모습을 보고, 선생님께서 살짝 무리를 해서 넣어 주셨고, 그때, 타일반과 미장반이 한 반이 되었다.
비록 칸 막이가 나누어진 다른 반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미장반이 아닌 타일반으로 내일 아침부터 나갈 생각을 하니, 호랑이 선생님께 죄송스럽기도 했지만, 타일 자격증에 다시 도전을 해야 하는 나로서는 6개월 중에서 벌써 3개월은 쓴거나 마찬가지라서,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하는 일 이라서 긴장의 끈을 놓칠 수가 없었다!
타일 반 에 들어가고 나서도, 초기 물량은 필요했는 데, 고맙게도, 먼저 시험 보신 선배님들이 준비물과 필요한 것들을 조금씩 챙겨 주셔서 생각보다 많은 물건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겁이 났던 건...!!
바로 그라인더 였다.
처음 타일반에 들어가면, 준비물과 재료들을 가지고, 일단 못을 박고, 실을 매는 연습을 한다.
못에 실의 매듭을 묶고, 그 실이 달린 못을 70센치 정도 되는 낮은 벽에 박는다.
그리고 그 실은 팽팽하게 잡아 당겨 그걸로 수평을 잡는 연습을 한다.
수평을 잡는 연습을 처음부터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첫 시작이 잘못 되었기 때문에, 타일의 간격과 모양, 줄눈은 엉망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타일은 첫 단추가 중요했다.
게다가 미장때 와는 다르게 시멘트를 기계가 아닌 손으로 직접 개어서, 물양과 농도, 점도, 질감을 맞추어야 했는 데, 아침마다 그 일을 반복 또 반복 하다면, 손 바닥에는 물집과 굳은 살이, 어깨와 팔뚝은 퉁퉁 부어서 마치 화가 난 모양을 하게 된다.
다른게 운동이 아니라, 나에게는 타일 반에서 직접 반죽을 개는 게 운동이 돼버린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