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 타일반 그리고 나 2.
처음 타일반에 들어가고 못에 실을 매는 연습만 하루 종일 하다 보면, 게다가 어쩌면 미장반 보다 더 매캐하고 시멘트의 특성상 더욱 차가운 느낌이 드는 그곳에 있다 보면, 온몸이 수축되는 기분이 든다.
과연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가 맞나? 하는 의문도 같이 드는 순간이 오지만, 미장에서 다져진 눈빛들과 호기심 어린 시선들을 모두 이겨낸 내가, 이제는 사람들이 더 많은 타일반이라고 해서 주눅 들 일은 절대로 없었다.
타일반에는 아주머니 서너 분이 계셨는데, 대부분 시간을 때우러 오시는 분들이었다.
타일을 진짜로 연습하시는 분은 그중에 1분이었고, 나머지는 실업급여를 받을 때 필요한 직업학교를 다니면 구직 이수가 되므로 시간을 때우러 오신 경우가 많았다.
그런 분들을 보는 시선은 다른 반 보다 젊은 연령을 가지고 있는 타일반 선생님들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지만, 대개는 모든 반의 사람들은 부딪히지 않고 잘 지내는 편이었다.
그중에서는 전남 보성에서 새벽부터 운전해서 오시는 분도, 무안에서 올라와 직업학교에서 마련해준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오는 분도, 혹은 멀리 충남에서 경기도에서 오시는 분들도 섞어 계시기도 했고, 호주에서 타일을 붙였던 형제도 있었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그들은 온 것이었고, 반에서 모두를 통틀어서 그들의 나이가 가장 어렸다. 그러나 그들은 중간에 시험을 보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서 떠났지만.
타일 반에서의 첫날은 실과 못 그리고 수평과 수직의 싸움이었고, 두 번째 날부터는 이제 실을 매단 못을 박고, 본격적으로 타일을 붙이기 시작했다.
시험이 중요했으므로 대부분은 하루 종일 시험에 출제되는 문제만 열심히 연습한다.
그리고 직업학교도 선생님들 성과가 중요했기에 시험에 많이 합격하는 게 곧 성과와 능력으로 이어졌다.
타일을 붙이는 데, 기분이 묘했다.
수평과 수직으로 맞춘 타일을 첫 지점에 붙이던 순간을 나는 평생 못 잊을 것 같다.
엉망이고, 밥도 제대로 양을 못 맞추어서, 질질 사이로 흘러나왔지만, 그래도 타일을 붙였다.
비록 달랑 1개라도! 내 손으로 직접.
그렇게 벽면을 하나 가득 하얀 타일로 붙이고 나면, 그다음엔 다시 떼고, 다시 그 자리를 청소하고 또 하얀 타일을 붙인다.
못은 여전히 다시 박고, 실도 팽팽하게 연결해서 계속해서 그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고 만다.
누군가는 그 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져서 중간에 자고 오는 분들도, 편의점에서 커피를 드시고 오는 분들도 혹은 조퇴를 밥 먹듯이 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나는 연습장에서 5일 내내 화장실 가는 시간을 빼두고 있었다.
자리를 바꿔가면서 연습을 해야, 어느 자리가 벽이 고르고, 혹은 어느 자리가 울퉁 불퉁하고 게다가 마른 벽 습한 벽 또는 깨진 벽 정갈한 벽 도 있어서, 손에 익기 때문에 되도록 하루나 이틀을 연습하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는 편이었다.
내가 먼저 미장반에서 타일반으로 넘어오고 나서, 그 뒤에 이어서 미장반에 계시던 어른들이 우르르 넘어오셨고, 또 한 번은 타일반에 계시던 분들이 시험이 끝나자 미장반으로 가시던 분들도 생겨났다.
반 대 통합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하루 이틀, 그렇게 연습을 하다 보면, 한 달이 조금 못되던 날에는 바닥 타일을 붙이게 되었다.
시험은 벽과 바닥에 정해진 시간 내에 타일을 붙이는 것이었는데, 벽은 하트나 사각형의 모양을 중간에 만들어서 모양을 내는 것으로, 바닥은 물길을 잡아서 단차를 보는 거였다.
벽과는 다르게 바닥은 훨씬 어렵다.
평평한 바닥 위에 물길이 지나갈 수 있게, 물이 잘 빠질 수 있게 하수구 쪽으로 모여들게, 0.1미리 정도의 단차만 주는 일이 세상에서 나는 가장 어려웠다.
말이 0.1미리이지, 하다 보면, 1센티 이상 혹은 2-3센티의 단차를 주어서 물길을 만들어 주게 돼버린다.
그러면 바닥의 떠 보인다.
바닥에 깐 타일이 고르지 않아 보이고, 육안으로도 쉽게 이건 초짜가 한 솜씨가 틀림없군..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연습, 또 연습, 다시 연습만이 살 길이었다.
마치 김연아가 된 기분으로 말이다.
타일을 붙이다 보면, 미장과는 다르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이 못과 실처럼 내 인생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말이다.
그랬으면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도, 혹은 엄마만 있었을 경우라도, 또는 내가 20년을 오로지 이루고 싶어 하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라도 나는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것들이 머릿속으로 휘젓는다.
물론 시험 연습으로 한 달 정도만 못과 실로 수평을 맞추고 시험을 볼 때는 레이저라는 아주 훌륭한 기계를 사용해서 수직과 수평을 맞추지만, 레이저가 없었을 때는 무조건 실과 못으로 수평과 수직을 맞추었다고 하니. 그리고 요즘도 타일을 붙이는 전문가 분들 중에서도 실과 못을 사용하시는 분들도 계신다고 하니, 나는 문득 궁금한 거였다.
이 정성으로 내가 과거의 시간들에 좀 더 제대로 내 인생도 수직과 수평을 맞추기 위해서 더욱 노력했다면 현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예전에 내 절친에게 내가 만약 과거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예를 들어서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실업계 고에 진학해서 바로 취업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물어본 기억이 난다. 나는 10대에 우리 집이 사정이 어려운 줄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던가?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는데, 수학여행비용은 어찌 냈는데, 수학여행에 가서 쓸 돈이 없었다.
돈이 없었던 나는 가기 직전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을 했는 데,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들어오는 길에, 엄마가 내 손에 3만 원을 쥐어 주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돈이 우리 집 쌀 값이라는 사실을.
돈 3만 원을 쥐어주며 엄마는 괜찮은 듯 웃으며 말했다.
“ 재밌게 놀다 와 딸”이라고.
나는 3만 원을 손에 꽉 쥐고, 한동안 엄마를 보지 못했다.
수학여행이 뭐가 중요하다고, 갈팡질팡 했을까? 이 돈이면 밥을 먹고, 거기에 반찬도 몇 개 먹을 수 있는 우리 가족들 식대인데.. 하는 생각으로 나는 나를 원망했고, 수학여행 지에서도 그다지 재밌게 놀 수는 없었다. 다만 나는 그 3만 원을 꼭 손에 쥐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 엄마에게 주었다.
실은 나한테 3만 원이 중요했던 게 아니었다.
15살의 나는 가족들과 함께 무언갈 먹는 게 중요했고, 동생들도 나로 인해서 굶지 않는 게 중요했다. 당시 우리 집 사정이 얼마나 안 좋았냐면, 천정에 구멍이 뚫려서 비가 샐 정도였다. 그런 집이었는데, 나는 좀 더 빨리 현실을 알았으면서 어쩌면 되지도 않는 일에 현실을 뒤로하고 헛된 꿈만 꾼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우리 집 사정은 좋아지지는 않았다.
혼자서 일하는 엄마가 아버지, 치매에 걸린 할머니, 사업에 망한 작은 아버지들의 자식들과 또 한때는 작은 아버지들을 먹여 살렸다.
아버지가 아프고 나서는 엄마가 병간호를 해야 해서, 막내 남동생과 함께 인천에 있을 땐 정말로 우리 집엔 쌀이, 먹을게 하나도 없었다. 전기는 3개월치가 밀려서 곧 있으면 끊길 판이었고, 여동생과 나는 배가 고팠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저금통을 털어서 얼마 되지 않는 동전으로 할아버지한테 전활 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3만 원을 붙여주었다.
그 돈으로 여동생과 나는 컵라면을 사 먹었지만, 나머지 돈은 아주 작게 쪼개고 또 쪼개서 써야 했다. 엄마가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나는 그런 생각을 할 적이면 다른 이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망스러웠다.
방안 퉁수처럼 집에만 있지 말고, 아르바이트라도 할 걸.
공부만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할걸 하고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 또한 어렸고,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가득 찬 인간이었으며, 모두들 나를 비웃다는 생각으로 남들의 시선이 너무 두려웠다.
시선이 두려워 당시에 핫 했던 프랜차이즈 알바는 꿈도 못 꾸던 20살.
지금은 그 나이가, 그 시절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안다.
하지만, 이제야 수평과 수직을 잡아가는 내가 당시에는 어떻게 수평과 수직을 잡아야 할지 모르는 나였다.
나이가 더 먹고 나서야, 나는 평범함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구나를 깨달았고, 24살의 엄마가 나를 낳았던 시절에 엄마도 어렸으니 당연히 몰랐을 테고, 평생을 남의 집에서 일만 하다가 살았던 엄마도 우리를 굶기지 않으려 무던히도 애를 썼을 테니, 다른 건 엄두도 못 냈을 거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안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첫 못을 박을 때처럼, 내가 제대로 된 삶의 못을 박았다면 조금은 내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은 여전히 내내 한다.
“ J야 너는 열심히 살았어. 너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 너도 어렸잖아. 다른 건 할 수 없었을 거야. 안 그래?”
친구가 나에게 그렇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가득 찬 내가, 정말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첫 못과 실을 벽에 박는 내내 나는 그 생각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타일을 붙였던 것 같다.
하얀 타일과 노란색 하트를 만들고, 그 무서운 그라인더를 손에 쥐고서 말이다.
그라인더는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나뿐 아니라 남도 위험하게 만든다.
자칫 잘못하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파편이 날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쥔 그라인더가 날아가 그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게 그라인더 였다.
그러므로 그라인더를 잡은 손에는 늘 힘을 주고, 하지만 너무 힘을 주면 흙으로 고온에서 구워낸 도기 타일이 깨져버리니... ... 부드럽고 유연하게 잡는 게 늘 중요했다.
안전하지만, 부드럽고 유연하게, 그게 바로 그라인더를 잡는 방법이자 사용법 이었다.
그리고 그라인더를 잡는 방법으로 인생을, 내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면, 우리는 상처 받더라도 혹은 상처주더라도 상처를 아물게 하거나 빠르게 사과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전기로 돌아가는 작은 톱이라고 생각하면 쉬운데, 그 그라인더로 타일을 하트 모양과 작은 네모와 세모 조각들로 잘라서 타일을 붙여야 하는 게, 타일 시험이다.
벽 면은 정 중앙에 빈 하트에 다른 작은 하트를 넣어서 모양을 완성하고, 바닥은 하수구와 매질을 넣어야 하는 데, 하수구 모양으로 세모 조각 와 구멍을 뚫은 네모 타일을 만들어야 하는 게 난관이었다.
쌀 국숫집을 할 때, 육절기를 사용한 적은 있어도, 이 작은, 돌아가는 움직이는 그라인더를 한 손에 쥐고, 갈아야 하는 일.
나는 그 일에 얼른 익숙해져야 했다.
두려움만 가지고는 아무도 대신해 주지 않기 때문에!
일단 그라이던 사용법 설명을 들은 나는, 직업학교에 있는 그라인더를 가지고, 아침에 일찍 와서, 모양을 하루에 6번은 만들고자 노력했다. 한 시간마다 한 번씩 벽에 붙이고, 그 모양을 만들다 보면, 6시간은 어느새 훌쩍 니가고 있었고, 처음에 두렵기만 했던 그라인더 도, 어느새 손에 익어가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는 데, 그 시작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마치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자유자재로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험에 맞게, 문제 유형에 맞게 익숙하게 그라인더를 가지고 모양을 따는 것.
그게 바로 내 목표였는데, 한 달을 꼬박 그라인더를 일주일에 5일을 연습하다 보니, 120시간이 모여서 시험 문제 나오는 하트와 세모 그리고 파인 동그라미와 네모는 익숙해졌다.
두려움도 익숙함으로 대하다 보니, 어느새 친구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한 도구라서 그런 걸까?
막상 해보려 하면 당연히 겁이 난다.
태어나서 사람들이 많은 일을 경험해 보고,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련만은,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절대로 길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걸, 좀 더 빨리 깨닫는 시간이 오면 좋겠지만, 늘 그렇듯, 무언가의 값을 치르고 나서야 우리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늦더라도, 익숙지 않더라도, 두렵더라도, 하나씩 차근차근, 차분하게 하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그 시간들이 쌓이고 또 쌓여서 두려움을 익숙함으로 이겨낸 나를 만들어 낸다.
상상해 보라, 한 손에 그라인더를 멋지게 들고, 한 손에 시멘트 밥을 묻히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상상만으로도 나는 막 흥분이 되었다.
막노동 현장에서는 여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낮기 때문에, 그 안에서 경력만 쌓으면 아마 나는 훨씬 멋진 내가 되었을 거였다.
처음의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상상 속에서 멋진 나의 모습을 그리는 또 다른 내가 된 거였다.
과거의 나는 지질하고, 후지고, 남들보다 늘 뒤처진 인간이었는 데, 직업학교에서의 나는 지질하지도 후지 지도 뒤처지지도 않았다.
다만 나의 속도로, 나의 시간으로, 모자라면 채울 수 있게, 부족하면 어떻게 해서든 메꿀 수 있게, 넘치더라도 여전히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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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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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면, 미장과 타일을 배우던 6개월의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배웠다.
나도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인 삶인데, 나도 큰 딸이 처음이었고, 나도 언니, 누나, 친구가 처음인데, 너무도 나를 혹 독고 철저하게 다른 이를 위한 삶을 먼저 배우고, 희생하고 뒤로 물러나는 법을 먼저 배운 게 아닌가 싶다.
익숙하지 않은 게 당연한데, 익숙해야만 하는 상황으로 나를 몰아넣었고, 어색함이 필수인데, 어색하지 않다면서 스스로를 그 안에 가두어버린 거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초보 인간들이 그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에게 이 번 생이 처음일 텐데, 어리다고 해서, 나이가 많다고 해서,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모두들 같지 않을 텐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극한으로 몰아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코너에 몰아두고는 문제가 발생하면, 그 즉시 스스로를 희생해버리고 마는.
그런데 왜? 우리는 맨 처음 놓아버리고 희생하는 우리 인 걸까?
왜 남이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우리를 놓아 버리는 걸까?
우리가 제일 소중하지 않아서?
우리가 제일 아름답지 않아서?
우리가 제일 착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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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우리가 제일 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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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중하다.
우리는 아름답다.
그리고 우리는 착하다.
성격적인 결함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인간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그런 존재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스스로를 너무도 혹독할 정도로 평가 절하해하면 살아온 건 아닐까?
남들도 우리를 깎아내리지 못해서 안달인데, 취업하려고 하는 청년들은 회사와 학교, 가족들에게 평가절하당하고, 대학에 가려고 하는 입시생들은 자기들끼리 평가절하를 하면서 또 가고자 하는 학교에서도 평가절하를 당하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이는 가족에게 또 어떤 이는 남 모를 누군가에게 내내 평가절하를 당하는 데, 왜 굳이 우리까지 우리를 평가 절하하는가?
나는 더 이상 나를 평가 절하하기 싫어졌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하고 말도 하기 싫어졌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더욱 얼굴이 보기 싫어졌다.
우리는 우리 그 자체로도 괜찮다.
남들이 뭐라고 하면 어때?
뚱뚱한 사람들이 스커트를 입으면 뚱뚱하다고 뭐라고 하고, 또 바지를 입으면 드러내야 날씬해 보인다고 하고, 마른 사람들이 그렇게 입으면 또 다른 이유를 대서 속닥 거리면서, 어떻게 하라는 건가?
그럴 땐 나는 속으로 말한다.
좇까라고...
내가 이렇게 변한 데는, 한 번의 그 커다란 환경의 변화가 끼친 영향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전의 나라면 나는 내내 주눅 들고, 눈치를 보고, 잘릴 까 봐 전전 긍긍하고, 사랑받지 못할 까 봐 설설 기는 나였을 텐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경험으로, 다른 이의 시선을 똑바로 본다.
그리고 아무런 말 도 못하고 가는 그들의 뒤에 대고 가운데 손가락을 살며시 올려보고는 한다. 입 꼬리를 잔뜩 올리면서.!!
그렇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드디어 시험날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