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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Jan 29. 2022

괜찮을 때의 나는 참 재수없다


 괜찮은 상태일 때의 나는 상당히 긍정적이다. 모든 아픔과 슬픔 앞에서 이 또한 지나가리라 확신하고, 오늘 해내지 못한 일은 내일, 내일도 해내지 못하면 언젠가 반드시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사람이 된다. 이때는 흐린 하늘조차 어떤 의미를 품고 글감이 되어줄 것만 같다. 한참 동안 우울과 무기력 속을 허우적대면서 어그러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겨우 밖으로 기어 나와서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게 된다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까.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이제 막 우울에서 벗어나 상위 1% 안에 들 정도로 낙천적인 사람이 된 나는 부지런해진다. 미뤄뒀던 글을 쓰고, 공부하고, 체계적으로 일을 해치운다. 그중엔 “매일 일기 쓰기”도 있는데, 그때의 내가 써놓은 일기를 이후에 우울해진 내가 보면 이런 생각부터 든다. 이 자식 참 재수 없네. 우울해진 나는 괜찮을 때의 내가 한없이 재수 없다. 특히 이런 말을 써놓았을 때.


“다시 좋아졌다가 또 언젠가 나빠질 수 있겠지. 우리는 그걸 계속 반복하겠지. 끝없이. (...) 그래도 전보다 낫다는 데서 위안을 얻기로 했다.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적어도 지금은 괜찮고, 최악의 상황도 아니니 사서 걱정하지 말자.”


이날의 나는 일기의 한 페이지를 성실하게 꽉 채운 것은 물론이고 스티커까지 써가며 일기를 예쁘게 꾸며놔서 더 재수 없다. 사실 화가 날 일도 아니고, 이 말이 재수 없게 느껴질 것도 없는데 나는 과거 괜찮은 상태였던 내게 화가 나고, 또 일기를 써둔 당시의 내가 되게 재수 없다. 할 수만 있다면 멱살을 잡고 네가 뭘 아냐고 따지고 싶어진다. 모든 게 다시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이번에는 정말로 지나가지 않을 것만 같다고, 혹 지나간다고 해도 다시 또 가라앉게 된다면 이 모든 게 지나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어쩔 줄 모르고 선 현재의 내게 과거의 나는 보기 드물게 맑은 얼굴을 하고 모든 일은 지나간다고, 앞으로도 나쁜 일을 겪게 되겠지만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고,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괜찮은 상태일 때 나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생각도 밝게 하는 편인데 상태가 나빠져서 그때의 나를 보면 참 재수 없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재수없는 말을 다시 일기에 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게 된다. 그럴 수 있다고, 괜찮을 거라고 적어놓은 과거의 나를 재수 없다고 흘겨보면서도 다시금 어느 날의 내가 재수 없다고 여길 말을 써놓고, 또 다른 어느 날의 내가 재수 없는 소리를 써놓을 수 있길 바라게 된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굴레 아닌가. 생각이 여기까지 닿은 걸 보면 곧 일기에 재수 없는 말을 쓸 수 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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