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주간열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열음 Feb 05. 2022

없다고 해서 치명적이지는 않겠지만


21년 11월 9일 노잼 시기의 복판에 있던 나는 일기에,


“최근에는 관심사 자체가 희미해진 느낌이다. 책도 안 읽고 있고.

그새 또 다 타버린 걸까. 재만 남아서 이렇게 푸석하게 숨을 이어나가고 있는 걸까.”


라고 썼다.

21년 11월 24일 노잼 시기를 지나온 나는 일기에,


“요새는 좀 즐겁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두 문단을 최애 얘기로 할애한 다음,


“(나는) 덕질하면서 지내야 하나보다. 확실히 일상에 생기가 돈다.”


라고 썼다.


  두 개의 문장은 분위기부터 다르다. 11월 24일의 내가 얘기했듯 나는 덕질하면서 지내야 되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해보면 초등학생 때부터 늘 푹 빠져서 지내는 대상이 있었다. 그 대상은 사람일 때도 있었고, 아닐 때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는 인터넷 소설을 좋아했다. 틈만 나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소설 카페에 들어가 소설을 읽었다. 중학생 때는 판타지 소설에 빠져서 친구를 통해 대여점의 판타지 소설을 빌려 읽다가 이후에 만화에 빠져서 주야장천 그림을 그리고 패러디 소설을 썼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아이돌에게 반했는데 이는 스물일곱, 여덟의 노잼 시기를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좋아하는 팀은 여러 번 바뀌었지만.


 노잼 시기를 겪기 전까지 덕질은 내 삶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없다고 해서 치명적이지는 않겠지만 없다는 그 자체를 상상할 수 없는 아주 당연한 것 말이다. 내게 노잼 시기가 찾아올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노잼 시기보다는 할머니가 돼서도 앨범을 사고 있는 내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을 정도다. 그러다 맞이한 노잼 시기는 잿빛 그 자체였다. 뭘 해도 재미가 없다는 건 재미없다는 그 사실조차 제대로 체감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그때 알았다. 무얼 보고 또 무얼 듣던지 예전만큼 황홀하게 와닿지 않았다. 좋긴 좋았는데, 그 자체가 거짓은 아니었는데, 이전에는 감정의 결을 세세히 느낄 수 있었다면 이제는 “좋다”라는 반죽 덩어리를 턱 하고 품에 안은 느낌이었다. 예전처럼 무언가를 깊게, 열렬히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사실이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그조차 점점 무뎌지고 있었다.


조금씩 더 무뎌지는 방향으로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전처럼 온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점차 무뎌지고, 무뎌지는 것에도 무뎌질 때 즈음 뜬금없이 다시 덕질을 하게 됐다. 좋긴 좋은데, 노잼 시기를 이겨냈다고 할 수 있나? 의문이 들었다. 나는 덕질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놓쳐버린 게 아닐까? 덕질을 다시 시작하고 즐거운 것과 별개로 새끼손톱만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2021년 11월 24일의 내가 말했듯 요새 좀 즐거우면 그걸로 됐지 않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는 요새 몹시 즐거우니까. 혹시 다시 덕질을 못하게 되고 또 다른 노잼 시기를 맞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지난 노잼 시기에 그랬듯 시간을 들여 새로운 방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괜찮을 때의 나는 참 재수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