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시작될 때는 겨울이 좋았던 것 같은데 연말의 설렘이 지나고 나니 세상에 계절이라곤 겨울밖에 남지 않은 것 같다. 얼마 전 흐린 날씨가 이어지던 날에는 언제 거리 곳곳에 따스한 기운이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냐는 듯이 시린 바람이 불었다. 쉬지 않고 몰아치는 바람에 봄기운이 모두 날려간 것은 아닐까. 어쩌면 봄은 이제 다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전기장판으로 따끈하게 데워진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누워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부드러운 온기를 생각했다. 온기는 바람에 날려가면서도 꺄르르 꺄르르 웃었을 것만 같다. 실없는 생각을 이어갔다.
누운 채 눈을 꼭 감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내 취미이자 특기는 독서가 아니라 망상이었으니까. 망상 속에서 나는 취직해서 월급을 받았고, 다시 주마다 로또를 샀다. 엄마에게 아빠 몰래 용돈을 주거나 망설임 없이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책을 여러 권 결제했다. 그럼 무슨 책부터 사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접었다. 이상하다. 이쯤 되면 의식이 가물가물해야 되는데. 또 다른 망상을 하기로 했다. 이번 망상 속에서는 내가 쓴 글이 많은 사람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기뻐할 겨를도 없이 과거에 쓴 글에서 내 나태함이 도마 위에 올라 관심은 곧 비난으로 탈바꿈했다. 흐음. 아무리 망상이라지만 정도가 지나쳤다. 내가 쓴 글 중에 수많은 관심을 불러올 만한 글은 없었으니까. 재빠르게 다음 망상으로 넘어갔다. 그 속에서 나는 버거울 정도로 깊고 진한 사랑을 받고 있었고, 수마가 몰려왔다.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모를 시간에 까무룩 잠에 잠겼다.
책을 읽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싶고, 좀 더 다양한 일을 해보고 싶다. 주마다 올리는 일기 말고 더 정제된 에세이를 연재하고 싶고, 오래도록 생각했던 소설을 쓰고 싶다. 눈을 떴다. 오전 9시에 울린 알람을 끄고 10시에 새로 맞춘 것은 기억이 나는데 — 책상이 아니라 머리맡으로 옮겨온 핸드폰을 확인했다. 12시 33분. 눈을 뜨자마자 하루의 절반이 날아갔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님에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은 늘 같다. 다시, 잠시 눈을 감았다. 잠에 까무룩 잠기고 싶었다. 머리맡에서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보나 마나 서점 광고 알림일 것이다. 눈을 떴다. 예상대로 신간 알림이었다. 별생각 없이 트위터에 들어가 잠들었던 사이 올라온 트윗을 읽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1시 1분. 이젠 정말로 더는 미룰 수 없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놓고 목줄을 꺼냈다. 우리 집 작은 녀석과 산책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녀석은 내가 청소를 끝낸 순간부터 눈으로 나를 쫓다가 내가 걸레를 빨아서 베란다에 널고 나면 내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마치, 이제 나가? 이제 나가? 하고 묻는 것처럼 내 뒤를 쫓고, 두 발로 일어나 내 엉덩이를 가볍게 밀고, 내 다리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반짝이는 눈과 함께 집을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스쳐 두꺼운 기모 후드의 소매를 내렸다. 집을 나서자마자 내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킁킁거리며 길을 훑는 작은 녀석을 따라 버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 작은 몸 어디에서 기운이 솟는 걸까. 녀석을 따라 걸을 때마다 생각하지만 역시 모르겠다. 혹여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워 먹지 않을까 녀석의 얼굴을 살피고, 급한 걸음을 옮기다 녀석을 밟는 일이 없게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는 일에 집중했다. 한참을 걷다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다. 시야에 화사한 벚꽃이 들어찼다. 초록의 풀숲도 그 아래 살랑이고 있었다.
낑깡아, 언니 1분만.
작은 녀석은 내 부탁은 안중에도 없이 킁킁 냄새를 맡기 바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 안에 화사하게 만개한 벚나무를 담았다. 핸드폰을 도로 넣고 내려보니 녀석은 언제 냄새를 맡고 있었냐는 듯 의젓한 얼굴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봄이 왔어. 녀석은 그저 왜 앞으로 가지 않냐고 묻는 듯 나를 말끄러미 올려본다. 도로의 양쪽을 확인한 후 가자, 말하니 길쭉한 꼬리가 꼿꼿이 선 채 가만가만 흔들린다. 아스팔트를 딛고 선 네 개의 작은 발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게 횡단보도 위를 걷는다. 나는 다시 녀석의 등과 꼬리를 주시하며 걷는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벚꽃을 보고 다시 녀석을 쳐다보면 녀석도 풀숲에 고개를 박고 킁킁대고 있다. 봄이 왔다. 두꺼운 기모 후드가 버겁다 느껴진 것이 며칠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앙증맞은 꽃봉오리가 군데군데 맺히고 시야 구석에 초록이 움튼다 싶더니 어느새 화사한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봄은 대체 언제 온 걸까. 어느 틈에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하얀 꽃을 펑펑 터뜨린 걸까. 화단에 코를 박고 고개를 들 줄 모르는 작은 녀석을 내려본다. 내가 매일 너를 산책 시킨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나를 살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봄이 왔어. 다시 해주고 싶은 말을 삼키면서 낑깡아, 가자, 하고 두어 차례 부르니 아쉬운 기색도 없이 고개를 들고 다시 앞장서기 시작한다. 파란 하늘의 배경으로 화사한 벚꽃을 힐끔힐끔 구경하면서 주머니 속에 고이 품어온 말린 고구마를 생각했다. 오늘은 네가 맛을 조금 음미하면서 먹어줬으면 좋겠다. 앞서가는 작은 녀석의 꼬리가 빳빳하게 선 채 발랄한 걸음을 따라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