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했다. 언젠가 자주 들었던 그 말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떠올랐다. 몹시 적절해서 나 자신에게 화가 나거나 어이가 없어서 얕게 웃을 만도 했는데 화도,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현재 나는 고층 빌딩의 비상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12층에서 출발해 어느새 16층이었다. 4개 층을 오르는데도 몸에 열이 올랐다. 이르게 찾아온 더위를 예상하지 못하고 봄에 입을 재킷을 걸친 탓이었다. 입가에선 뜨거운 숨이 훅훅 샜다. 거친 숨결을 따라 시야를 어지럽히는 머리칼이 같이 흔들렸다. 눈앞의 계단에 발을 디뎌야 하는지 헷갈렸다. 결국 제자리에 멈춰서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상체에 둘러 멨다. 두꺼운 재킷을 벗어 팔에 걸었고,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그러나 갈 길이 멀었다. 내가 가야 하는 곳은 21층의 면접실이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양 귀 뒤로 넘기며 다시 발을 뗐다.
올해 몇 번째인지 모를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전날 위치를 확인해두었던 덕에 1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문자로 미리 안내받은 대로 로비에서 임시 출입증을 발급 받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마침 점심때가 가까웠던 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알맞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곧 당황해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내부에 층수를 누르는 버튼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둘러봐도 특별한 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이때부터 패닉이었다. 잠시 헤매는 사이 3분이 흘렀다. 시간 내로 면접장에 도착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사 담당자분께 바로 연락을 드려 양해를 구했다. 인사 담당자분께서는 괜찮다고 하셨지만 내가 괜찮지 않았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래서 우선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바깥에서 보니 도달하는 층수를 상단에 띄워주고 있었다. 12층으로 향하는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층수가 바뀌는 것만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서 같이 타고 있던 분께 21층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봤다. 그는 난감한 듯 웃더니 밖에서 층수를 입력하고 들어와야 하며, 1층으로 돌아가서 21층을 누르고 다시 타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마음이 급해서 멍청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에게 감사를 전했고, 우리는 12층에서 헤어졌다.
1층으로 돌아가기 위해 주변을 다시 살펴보니 원하는 층을 누르는 패드가 있었다. 아까 1층에서 물어볼 것을 후회하면서 1층을 눌렀다. 그리고 물러나 기다리는데 그제야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 더운 줄 모르고 재킷까지 꼼꼼하게 챙겨 입고 온 탓에 이마에 땀에 배어나고 있었다.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이마 위 땀을 톡톡 닦아내고 있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인사 담당자분의 전화였다. 아직도 면접 장소에 내가 나타나지 않아서 혹시 곤란한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확인차 연락을 주신 거였다. 곤란한 일 - 목이 탔다. 1층으로 가자고 호출한 엘리베이터는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시간은 자꾸만 흘렀다. 인사 담당자분께선 이번에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벌써 약속 시간으로부터 16분이 지나고 있었다. 면접에 지각이라니. 이번 면접은 텄다고 생각하면서도 발길은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그렇게 지금, 18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을 연속해서 오를 땐 괜찮았는데 다음 계단으로 넘어가기 위해 짧은 평지를 걸을 때면 허벅지에 추를 단 듯 다리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걸음을 옮기기가 어려웠다. 열음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제? 가볍게 떠올렸던 말이 이번에는 놀리는 듯 마는 듯 가벼운 어투로 들려왔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다녔던 단과학원 수학 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는 아이들이 문제를 풀고 있을 때면 어슬렁어슬렁 교실을 배회하다가 한 번씩 내가 문제 푸는 것을 들여다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열음아,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제? 그러면 나는 그 문제를 다시 돌아봤다. 맞게 풀면 그는 별말 없이 다시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다른 아이들의 문제를 봐줬고, 틀리게 풀면 야이 문디 가스나야, 똑바로 봐라, 라며 내가 놓친 부분을 짚어줬다. 나중에는 그 말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가 먼저, 머리가 나쁘면? 하고 선창하면 내가, 손발이 고생이지요 - 라고 뒤이어 말하면서 틀린 답을 지웠다. 그는 이따금 으이구, 하며 혀를 찼다. 혀 차는 소리가 어슬렁거리는 걸음과 함께 아주 아주 멀어지고 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머리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손발을 써서라도 해결하겠다는 건 근성이 좋다는 얘기가 아닐까.
내겐 그만한 근성은 없는데.
그 생각은 오늘로 취소다. 21층에 도착했다. 고작 9개 층을 오르는 일에 불과할지 모르나 운동 부족인 내게는 고작 9개 층이 아니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열이 올라 후끈해진 등에 축축한 기운이 더해졌다. 서둘러 휴지를 꺼내 땀을 닦아내고 계단을 오르는 내내 짐 같았던 재킷에 팔을 꿰어 넣었다. 풀어뒀던 셔츠 단추를 잠그고 머리를 다시 매만졌다. 후읍, 후 - 계단을 오르느라 뜨겁게 달아오른 열기가 마스크 안을 가득 채우고 볼을 데웠다. 그래도 좋았다. 드디어 도착했다. 속으로 환희를 삼키며 문의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안으로 들어서자 철문 위에 낯선 종이가 붙어있었다.
[관계자 외 사용금지]
철문의 손잡이 옆에는 검은색 카드 인식기가 부착돼 있었다. 가빠지는 호흡을 가까스로 다듬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임시 출입증을 꺼냈다. 삑 - 짤막한 기계음에 안도한 것도 잠시. 철컥,
문이, 열리지 않는다.
계단을 오르면서 달아올랐던 몸의 열기가 단번에 식는 느낌이었다.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감각에 몸이 떨려왔다. 거짓말이길 바라면서 임시 출입증을 다시 들었지만 시도해보기도 전에 결과를 알고 있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다. 삑, 철컥. 당연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근성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머리가 나쁘고, 성격이 급하면 진짜 손발이 고생하는 거였다. 나는 소리 없이 악을 쓰면서 비상계단으로 나왔다.
그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면접을 봤다. 나와 연락을 주고받으셨던 담당자분께서 어떤 사연으로 엘리베이터에서 20분을 헤맨 거냐고 웃으면서 물으셨고, 다른 면접관분께서는 혹시 엘리베이터에서 좀비가 나온 게 아니냐고 농담하셨다. 차라리 좀비가 나와서 늦은 거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면서 같이 웃었다. 이번 면접은 텄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지만 건물을 나서면서도 연락이 올 거라는 기대가 들지 않았다. 이날 면접으로 내가 얻은 건 오로지 다리 근육통뿐이었다. 근육통은 5일 정도 내 몸에 들러붙어 있다가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