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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May 21. 2022

책의 탑 아래에서


     올해 초에 책장을 샀다. 매일 밤 눈을 감고 잠드는 침대가 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수십 권의 책이 머리맡과 침대 옆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책에 묻혀 죽을지도 모른다. 읽지 못한 책에 짓눌려 죽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러나 물리적인 죽음보다 나를 구석의 구석까지 몰아붙였던 것은 내 머릿속을 그대로 꺼내 펼쳐 놓은 듯 혼란한 모양 그 자체였다. 바로 내가 내 손으로 직접 만든 방의 “꼬라지” 말이다.



     시작은 사소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책을 읽고 싶었다. 그날그날 마음 가는 책을 골라서 내킬 때까지 읽다가 잠이 오면 그대로 책을 덮어두고 자는 것이다. 뜬금없는 충동이었다. 나는 곧장 동네 다이소로 향했다. 마침 나무로 된 슬라이드 형태의 책꽂이가 있었다. 펼치면 두 칸, 접으면 한 칸인 책꽂이는 작은 크기에 10권이 넘는 책을 수용할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계산대에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즉시 책꽂이를 침대 위에 던져두고 거실 책장 앞에 섰다. 기분이 좋아서 콧노래도 흥얼거렸던 것 같다. 머리맡에 둘 책을 고르는 것뿐인데도 무척 설렜다. 어떤 책을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한강 작가님과 이슬아 작가님의 책이 포함됐던 건 기억 난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머리맡 책꽂이에 없는 책을 가져와서 읽다가 잠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집에 책을 사다 날랐다. 거실의 책장에 책을 꽂을 자리가 부족해지고 나서는 머리맡 책꽂이 곁으로 한 권, 두 권 책을 날랐다. 잠들기 전에 침대에 쌓인 책을 책상으로 옮겼고, 잠에서 깨면 책상 위에 쌓인 책을 다시 침대로 옮겼다. 번거로운 일을 몇 주 반복한 끝에 한 번에 옮길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쌓였다.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이때는 책장을 생각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는 쪽에 가깝다. 침대를 빼지 않고서는 책장을 놓을 만한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다시 다이소로 향했다. 그리고 궤짝을 들고 돌아왔다.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쌓인 책부터 확인했다. 머리맡 책꽂이와 거실 책장도 다시 훑어봤다. 곁에 둘 책을 다시 고르기 위해서였다. 궤짝을 한 칸의 책장처럼 세워서 두꺼운 책 위주로 꽂아 침대 옆에 놓았다. 세워놓고 보니 궤짝은 침대보다 한참 낮았다. 바라던 바였다. 낮은 궤짝 위로 짤막한 책의 탑 두 개를 만들어 올렸다. 정리했다고 보기 어려운 결과물이었지만 더는 아침저녁으로 책을 나르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실제로도 한동안 만족스럽게 지냈다.

책의 탑이 내 가슴께까지 닿았을 때 궤짝 하나로 미뤄뒀던 문제에 다시 부딪혔다. 그때도 나는 쉬지 않고 책을 샀다. 심지어 중고 매장에 맛을 들인 참이라 책의 탑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고 있었다. 책의 탑이 내 가슴께까지 자랐을 때 나는 직감했다. 더 쌓아 올리면 유리 탑이 될 것이다. 수시로 무너지고, 수시로 쌓아 올리는 삶은 아침저녁으로 몇 권의 책을 나르던 것보다 더욱 끔찍하게 다가왔다. 그러는 중에도 장바구니 속 책은 착실하게 이 방으로 오고 있었다. 고민은 짧았다. 책의 탑 위로 올릴 수 없는 책을 침대 옆 궤짝 앞에 내려놓았다. 새로운 책의 탑을 쌓기로 한 것이다.

그 덕에 책의 탑은 궤짝 위의 것까지 합해 총 6개가 된다. 나는 머리맡에 너저분하게 널린 책과 침대 옆을 지키고 선, 책의 탑 사이에서 잠들고, 꿈을 꿨고, 일어났다. 이때의 나는 집으로 책을 사 나르기 바빴지 잠들기 직전에는 단 한 문장도 눈에 담지 않았다. 책을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리에 누운 나를 에워싼 책은 본래의 의도와 정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위태롭게 쌓인 책과 혼란하게 널린 책이 무언가를 닮은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기도 했다.



     그날은 침대 옆에 늘어선 책의 탑이 무너졌다. 잠들 때도 책의 탑을 향해 팔을 뻗지 않도록 주의했기 때문에 책의 탑이 무너지는 일은 드물었다. 귀찮아 죽겠다고 툴툴대면서 책을 다시 쌓았다.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눈을 감자 나를 둘러싼 책이 내 위로 쏟아져 짓눌리는 모습이 그려졌다. 나를 짓누르는 책은 서늘한 단면과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반듯한 선과 각이 뭉개졌다. 말랑말랑하고, 흐물흐물하게 변한 책은 각각의 색을 잃고 한데 뭉쳐졌다. 나는 여전히 그 아래에 깔려있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책보다 언젠가 유행했던 슬라임에 전신을 짓눌리는 게 나은 걸까 - 고민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말랑말랑한 책이 코와 입으로 들이닥쳤다. 숨이 막히지는 않았지만, 몹시 불편했다. 몸을 움직여 책을 떨쳐내려 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실제의 책이었다면 몸을 움직여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선과 각을 잃은 책은 내가 발버둥 칠수록 내 팔과 다리에 엉겨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책장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더는 이렇게 지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책장을 산 건 올해 초, 책장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날로부터 반년가량(아마도) 지났을 때였다. 퇴사 직후라서 시간이 많았다. 방 안에서 자리만 차지하는 침대를 빼고 대신 책장을 넣었다. 방안의 책과 거실의 책을 모두 훑었다. 버릴 책을 골라냈고, 거실에 둘 책과 방안에 둘 책을 나눴다. 거실에 남겨둘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거실의 책장부터 정리했다. 버릴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곁에 두고 읽을 마음도 들지 않는 책이었다. 하나하나 꽂고 분류하다 보니 이런 책도 갖고 있었구나, 하고 놀랄 일이 몇 번 있었다. 거실 책장을 끝내고 방안으로 돌아왔다. 분류 기준도 없이 마구잡이로 늘어선 책의 탑이 보였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책의 탑을 하나하나 분해했다. 작가별로 소설을 나누고, 작가별로 나눌 만큼 많지 않은 소설은 한데 모았다. 새벽에 읽고 싶을 것 같은 에세이와 그렇지 않은 에세이를 또 나눴고, 만화책을 한곳에 모았다. 책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나누는 작업이 가장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책을 꽂아 정리하는 것은 각각의 구역을 나누자마자 순식간이었다.

바닥을 가득 채웠던 책이 모두 책장에 자리를 잡았다. 슬슬 물러나 방을 둘러봤다. 방이, 참, 깔끔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를 짓누르던 책이 모두 자리를 찾고 책장에 들어갔다. 방의 한쪽 벽에 위태롭게 서 있던 책의 탑도, 고개를 돌리면 시야를 가리던 책도 없었다. 내 머릿속을 그대로 꺼내 펼쳐놓은 듯 혼란하던 방이 아주 깔끔해졌다. 낯설고 개운했다. 몹시 미묘한 기분이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방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현관에는 버리기 위해 쌓아둔 책이 가득했다. 빈 가방에 낡고 더는 재미있지 않은 책을 꾸역꾸역 담았다.

오늘 깔끔하게 정리된 방은 또 혼란해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책을 사다가 나를 테니까. 책장에 더 들어가지 못한 책이 책장 밖으로 삐져나오고, 책장 옆에 책의 탑이 쌓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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