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찬장을 뒤졌다. 글을 쓰면서 조촐하게 한 잔 마시고 싶었다. 평소같이 맵고 짠데다 양도 많은 음식은 곁에 둘 수 없었다. 글은 뒷전이 되고,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틀 게 뻔했기 때문이다. …뭐, 꼭 그런 이유만으로 한잔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글을 쓰려니 생각나는 것은 없고, 겨우 떠올린 것을 붙들고 글을 써보려고 하니 문장마다 막혔다. 결국 두 문단도 쓰지 못하고 흐지부지 끊어진 글을 마주하고 말았다. 목이 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술 마시고 싶다. 냉장고 속 맥주를 한 캔 꺼내 풀탭을 치익, 탁! 하고 시원하게 따서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다. 치열하게 고민했다. 맥주를 기분 좋게 마시고 나면 곧 누워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실직고하자면, 두 문단도 쓰지 못한 글을 깔끔하게 지워버리고 일어서서 부엌으로 나오는 데까지는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먹을 게 있으려나 걱정했던 게 무색하게 부엌에는 가벼운 안줏거리가 몇 개 있었다. 맥주를 사 올 때 붙어있던 사은품 육포 하나, 며칠 전에 먹다가 남겨둔 옥수수 과자, 그리고 아직 뜯지 않은 감자 과자가 있었다. 접시를 꺼내 셋을 모두 담았다. 셋 다 양이 몹시 적어서(특히 육포) 그릇에 알맞게 들어찼다. 이 정도면 곁에 두고 안주로 삼기에 충분했다. 내심 만족하면서 젓가락을 챙기고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알맞게 차가워진 맥주 3캔이 나란히 줄을 맞추고 서 있었다. 며칠 전에 6캔짜리 한 묶음을 사다 두었는데 벌써 3캔이 사라지다니 - 소진되는 속도가 빠른 게 아닌지 염려됐다. 그러나 염려와 별개로 나는 착실히 맥주 한 캔을 챙겨 방으로 돌아왔다. 주전부리가 담긴 그릇과 젓가락, 맥주 캔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노트와 아이패드, 키보드, 그 곁에 술과 안주를 놓으니 책상과 함께 내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치익, 탁!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가 책상 위를 메우고, 동시에 차가운 맥주가 꿀꺽꿀꺽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크으, 이거지.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했지만 벌써 한 편의 초고를 써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같은 컨디션이면 단순히 “기분”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세 완성해주겠다는 의욕이 활활 타올랐다. 젓가락으로 감자 과자를 집어 와삭와삭 먹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뭘 쓰지? 마지막 일기가 한 달 전인, 4월 27일이었다. 읽을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악필로 쓴 일기였다. 당장 연재가 코앞이었다. 어수선한 일기에서 소재를 발굴해 정리할 틈이 없었다. 요즘으로 넘어와 지난 시간을 톺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요즘 - 뭘 했지? 최근에 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포카 홀더가 왔다. 최애를 동물로 캐릭터화한 아주 귀여운 디자인이었는데, 물건을 받은 그날 당장 최애 포카를 넣고 산책길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회상해봐도 좋은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걸 쓸 수는 없잖아. 흰 화면에 커서가 깜빡였다. 나는 간간히 맥주를 마시고, 손톱보다 작은 육포 조각을 씹었다.
요즘 - 아, 오늘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왔다. 전곡이 다 마음에 들었다. 외출할 일이 있어서 바깥을 걷는 내내 그의 노래만 들었다. 요즘 같은 여름날과 무척 잘 어울려서 더 즐거웠다. 지금처럼 늦은 밤에 들어도 좋을 터였다. 최근에 플레이 리스트를 꾸리는 게 어려워서 곤란하던 참이라 그의 신곡이 더욱 반가웠다. 그의 노래가 나오기 전에는 아이유의 노래 중에 요즘 기분에 맞는 곡을 골라 플레이 리스트를 짜서 들었다. 자주 들었던 노래는 〈에필로그〉와 〈아이와 나의 바다〉였다. 발매 당시에도 열심히 들었지만 요즘 더 와닿는 느낌이 컸다. 아마 다음의 가사 때문일 것이다.
“내 맘에 아무 의문이 없어 난
이 다음으로 가요”
〈에필로그〉 中
“삶에게 지는 날들도 있겠지
또다시 헤매일지라도 돌아오는 길을 알아”
〈아이와 나의 바다〉 中
노래를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나는 20대를 내 나름대로 잘 마무리하고 있는 걸까? 동굴을 찾게 되는 날에 전보다 빨리, 혹은 단단한 마음으로 나올 수 있게 됐나? 분명 전보다 나아진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확신을 담아 그렇다고 대답하기 어려웠다. 어떤 부분은 전보다 더 후져진 것 같아서. 어쩌면 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되는 부분 외에는 전부 엉망이 된 것 같아서. 그러다가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져서 말로 풀어내지 못하고, 글로 옮겨 적지도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정리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나았을 텐데 그게 어려웠다.
어떻게 아무 의문 없이 20대를 마무리하고 30대로 넘어갈 수 있었을까? 어떤 부분에서는 이해가 됐고, 어떤 부분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이해와 별개로 나는 현재 스물아홉을 살고 있고, 올해가 끝나면 여전히 정리되지 않을 20대와 작별하고 낯선 30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무리 이해되지 않는다고 떼를 쓰고 매달려도 시간은 쉼 없이 부지런히 걸어갈 테니까. 그렇다면 아니, 저 이해가 안 되는데요, 하고 고개만 저을 게 아니라 남은 시간이나마 20대를 무사히 마무리 지을 수 있게 애써보는 게 낫지 않을까.
답답한 마음이 치솟아서 반쯤 남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새 차가운 기운이 가신 맥주는 처음보다 맛이 덜했다. 이렇게 정리되지 않은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은 무리였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에 초고 한 편이 뚝딱 나올 것 같았던 기분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애초에 술을 곁에 두고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부터 문제였다. 남은 술을 싹 비우고, 푹 자고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보자. 그러고 보니까 아까 낮에 구독 중인 채널에서 새 영상이 떴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거나 볼까. 식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감자칩을 와삭와삭 씹으며 키보드를 책상 구석으로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