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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Jul 16. 2022

잊혀져 흘러간 글 속에서


     아이패드를 마련하면 글을 자주 쓰게  알았다. 원고지를 묶음으로 사면서 공모전 대상이라는 김칫국을 마시기도 했다.  노트  ,    자루, 연필  다스를  때마다 “이것만 있으면 나도…!”라며 즐거운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즐거운 상상에 꾸준한 노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헛된 망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나이가 됐다.  덕에 더는 김칫국을 그릇째로 마시며 웃을 일이 없었다.

몰스킨 노트를 보기 전까지는.



     아직 직장을 다니던 작년이었다. 살 게 있어서 서점에 갔다가 몰스킨 노트를 봤다. 진열대에 가지런히 정리된 양장 노트가 눈을 붙들었다. 예전부터 몰스킨 노트를 써볼까 생각했으나 만만치 않은 가격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놈의 가격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노트 앞에서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사실 노트는 집에 많았다. 심지어 글을 쓸 땐 문서로 작업하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실제로 펜을 잡는 일이 많지 않았다. 모든 것을 따져봐도 지금 내겐 몰스킨 노트가 필요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아쉬움에 미적거리면서 발길을 돌릴 무렵, 어떤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이 노트에 떠오르는 소재나 생각 같은 거 그때그때 정리하면 좋을 텐데…

가방에 막 넣고 다녀도 쉽게 구겨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이는데…

노트 디자인 보면 막 영감이 샘솟고 글도 잘 써질 것 같은데…


기름종이 같은 귀가 팔랑거렸다. 일리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메모 습관이 몸에 익지 않아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갖고 싶은 노트를 사서 들고 다니면 노트에 글을 쓰고 싶어서라도 메모 습관이 몸에 붙을 것 같았다. 순간 팔랑팔랑 흩날리는 마음에 손이 자연스레 진열대 위의 노트로 향했다. 노트에 손끝이 닿는 찰나,


그런 식으로 사서 쌓아둔 노트가 몇 권이지?


노트에 닿을 뻔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쥐며 진열대에서 반보 물러섰다. 집에 쌓인 노트가 떠오르자마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일전에 향후 5년간 노트 구입 금지형을 내렸던 것 같은데 순간 몰스킨 노트에 홀려 잊어버렸다. 처음 몇 장 쓰고 쌓아둔 노트와 아직 한 장도 쓰지 않은 노트를 돌아봤다. 거금을 들여 산 노트도 같은 꼴이 되겠다고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저렸다. 동시에 눈앞이 밝아졌다. 당장 살 것만 사서 서점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더 있다간 홀릴 게 분명했다. 그렇게 굳게 마음먹고 고개를 돌린 순간,


저기에 글 쓰면 간지날 것 같다고…


결국 나는 검은 양장 표지에 내지가 무지로 된 몰스킨 노트를 품에 안고 나왔다. 그날 이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몰스킨 노트를 가방에 넣어 다니며 순간 떠오른 영감을 놓치지 않고 모두 기록하리라 다짐했다. 몰스킨 노트와 함께라면 이직 준비와 소설 연재 준비 모두 완벽하게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몰스킨 노트의 제일 첫 페이지에 가장 아끼는 마스킹 테이프를 손가락 두 마디 정도 크기로 잘라 붙였다. 다음 페이지에는 월간 계획을 차근차근 썼다. 그리고 며칠 뒤 노트의 다음, 다음 장에 나는 이런 문장을 썼다.


몰스킨에 뭐든 쓰면 근사한 글이 나올 것 같았는데 역시 아니네.

자주 쓰지도 않는 데다 (...) 쓰는 사람이 바뀌질 않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안타깝게도 로망은 부서졌지만, 노트는 지금까지 잘 쓰고 있다. 절반 정도 썼다. 몰스킨 노트에 근사한 글은 쓰는 대신 이 노트와 함께 써온 글이 이곳에 제법 쌓였다.

요새도 외출할 때면 가방에 제일 먼저 몰스킨 노트와 볼펜을 넣는다. 순간 떠오른 영감을 포착해 메모하는 버릇은 들이지 못했지만 약속 시간보다 이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 시간이 뜰 때면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노트를 펼쳐놓고 아무 말이나 쓴다. 아무렇게 쓴 글은 대부분 잊혀서 흘러간다. 그러다 가끔 이렇게 흘려보낸 글 속의 문장을 건져와 다른 글에 엮어내기도 한다. 이 정도면 간지 운운하며 노트를 사자고 떼를 쓰던 그날의 내게 몰스킨 노트가 제 몫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살짝 알려줘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당분간 물건을 살 때 그에게 의견을 묻는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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