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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Sep 10. 2022

남의 일기


     〈일기시대〉(문보영, 민음사) 읽고 있다. 3월에 1부를 읽고 멈춰뒀던 것을 8 말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의 요정이 나타나 책에 손을   아니고선 내용은 바뀐  없을 텐데 다시 읽은 책은 3월에 읽었을 때와 느낌이 달랐다. 작가님의 시선이 독특하게 느껴져서 재미있는 부분은 그대로였는데 이전보다 문장이 깊게 스며드는  같았다. 무엇이 달라져서 같은 책이 다르게 다가오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고민할 시간에 책장을 넘기고 싶었다. 남의 일기 .  일기는 재미없는데. 매번 교훈이나 배울 점을 억지로 욱여 넣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니 작가님의 다른 글도 궁금해졌다. 에세이나 시집. 뭐든. 현실에서 한 발 물러나 별세계를 얘기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데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의 일기라는 게 재미있었다. 특히 2부에 시를 쓰게 된 계기나 시를 배우는 과정 이야기는 다 재미있었다. 낙엽 선생님께서 말씀해주신 병아리 감별사 얘기를 읽던 새벽에는 웃음 소리를 죽이느라 애썼다. 작가님도, 작가님의 스승님도 그런 과정을 거쳤구나. 그러니 나도 많은 글을 읽어야할 텐데.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 앞에서 입을 떡 벌리고 서서 입안으로 책 속의 문장이 밀려들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겠다 – 그를 깨달은 지금도 독서량이 크게 늘지 않은 것을 보면 나의 대부분은 아직도 책장 앞에 서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아침에 빗소리에 깨서 산책을 나가는 대신 〈일기시대〉를 읽다가 깜빡 잠들었다. 그리고 몹시 생생한 꿈을 꿨다. 꿈에서 깨고 나서 한참동안 멍했는데 순간 든 생각에 핸드폰을 집어 녹음 앱을 켰다. 메모로 한 글자씩 입력하는 것보다는 말로 남기는 게 훨씬 빠를 것 같았다. 나는 자다 깨서 푹 잠긴 목소리로 흐려져가는 꿈을 더듬었다. 모호한 꿈을 복기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횡설수설했다. 화면 속 하얀 막대가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하면서 길게 이어졌다.

     나는 꿈에서 소설 소재를 자주 얻는 편이면서도 꿈 자체를 정리해서 글을 쓰지는 않았다. 다른 재료는 다 보여주면서 마지막에 들어가는 빨간 양념의 레시피만은 공개하지 않는 대박 식당의 사장님과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꿈은 한편의 영화처럼 온전하게 남지 않았다. 드문드문 끊겨서 남았고, 현실의 내가 한번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꿈에는 과정이 부족했다. 여기에 있던 것이 갑자기 저기에서 나타난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았다. 모호한 부분을 연결하고 추론해서 정리하는 과정이, 솔직히 말해서 몹시 귀찮았다. 나는 꿈에서 쓸만한 소재를 건지는 것만으로도 꿈의 몫을 다한다고 생각했다.

     〈일기시대〉의 각 챕터 사이에서 나오는 꿈노트는 앞에서 잔뜩 늘어놓은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꿈노트에서는 꿈의 모호한 부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꿈속의 사건을 현실의 인과에 끼워 맞추지 않았다. 꿈에서와 같이 그대로 서술하는 것 같았다. 그게 굉장히 재미있었다. 특히 1부와 2부 사이에 나오는 꿈노트에서 꿈의 모호함이 잘 드러났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말을 아끼지만, 그건 정말 결말까지 완벽한 꿈이었다. 작가님의 꿈노트를 보고 있으니 내가 꿈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현상을 현실의 논리에 억지로 맞춰 재단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내가 나의 논리에 맞춰 꿈을 편집하는 사이 꿈이 가지고 있던 고유의 분위기가 하나 둘 자취를 감추고, 꿈의 뼈만 앙상히 남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가 내리는 아침, 유독 생생했던 꿈을 꾼 이후에 느닷없이 핸드폰에 대고 꿈 얘기를 떠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꿈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다. 꿈을 기억하는 일이 드물어져서 기록을 결심했던 마음을 까먹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음날 오전에 곧바로 생생한 꿈을 꾼 덕에 기록할 수 있었다. 꿈의 요정이 자비를 베풀어 기회를 한 번 더 준 게 아닐까. 뭐가 됐든 운이 좋았다.


     지금 〈일기시대〉의 가름끈은 4부 앞에 머물러있다. 이 글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돌아가서 잠들기 전 남은 부분을 읽을 생각이다. 또 어떤 재미있는 일기가 남아있을지, 기분 좋은 기대로 부푼 가슴이 소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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