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만나면 벅차다. 너무 좋은 나머지 글 전체에 밑줄을 좍좍 긋고, 여기저기 퍼 나르면서 이 글 좀 보라고 떠들고 싶다. 예전에는 좋은 글을 읽고 나면 가슴에 검은 하트를 품고 내가 쓴 글과 비교하기 급급했다. 그때 비하면 조금 시끄럽긴 해도 양반이 된 것 같다.
좋은 글에 관한 감상이 질투에서 경외로 바뀐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저렇게 좋은 글 못 써, 하고 징징대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정말로 못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비하가 아니다. 나는 좋은 글을 쓴 사람과 다른 삶을 살고 있고, 다른 생각을 하니까 그와 같은 글을 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인정하고 보니 나는 내가 생각도 못 할 글을 만난 것만으로 천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다. 천운이었다. 세상에는 글과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 많은 글 가운데 가슴이 벅찰 만큼 좋은 글과 이야기를 만났던 순간을 운명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대체 무엇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마음의 평화를 얻은 것은 축하할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가 내 글에 대한 고민까지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나는 글을 잘 쓰고 싶고, 더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잘 쓴 글과 좋은 이야기는 뭘까. 잘 쓴 글과, 좋은 이야기 - 몹시 멀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우선 범위를 좁히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가 하고 싶고, 나만 할 수 있는 이야기. 범위를 좁혀도 쉽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다. 생각하다 말고, 자주 잊어버렸고, 다시 질문을 떠올리고 생각하면서 드문드문 고민했다.
좋은 생각은 물을 좋아하는지 몸에 물을 묻힐 때 잘 나타났다. 세면대에서 양손 가득 물을 받아 기름진 얼굴 위에 끼얹었다. 차가운 물이 비몽사몽한 정신을 일으키는 동시에 내가 드문드문 찾던 질문을 같이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이야기를 하겠냐는 질문은 어떤 삶을 살겠냐고 묻는 것과 같지 않나?
그런 것 같다고 수긍하면서 다시 얼굴 위로 물을 끼얹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선택하는 것과 같았다. 당연한 사실을 당연치 못하게 깨달으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덕분에 어떤 글을 쓸 것인지에 관한 고민 앞에서 겪었던 막막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막막한 이유는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할 것인지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어려워진 것 같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삶까지 뻗어나간 생각이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선택하는 것조차 어떤 삶을 살겠다는 선택 같다고 생각하니 더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계속해서 글을 써야 했다. 더는 막막할 수 없었다. 어떤 사건 앞에서조차 계속해서 살아나가야 하는 것처럼, 나는 선택해야 했다.
나는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글쓰기와 책, 노래, 그 외에 또 좋아하게 되는 것들에 관해. 동시에 계속 고민하기로 했다.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하는 것과 같다면 분명 살아있는 내내 고민해야 할 테니까.
나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그럴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계속 고민하고, 좋아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