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주유소가 보였다. 주유소 앞에는 간판이 서 있고, 거기엔 휘발유와 경유의 가격이 적혀있었다. 윗줄에 1605, 아랫줄에 1815.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1605
1815
간판의 숫자를 보고 있으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8개의 숫자 중에 합이 10이 되는 조합을 찾아야 할 것 같은. 곧바로 눈앞에서 아랫줄의 181이 10으로 묶여 날아가고, 맨 오른쪽 두 개의 5가 10으로 묶여 날아갔다. 윗줄에 남아있는 1, 6, 0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감은 눈 너머로 새빨간 사과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사과 게임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오기 직전까지 했던 바로 그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유소 간판이 게임판과 흡사한 탓인지, 내가 사과 게임에 중독되고 만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후자일 가능성이 크겠지.
최근에 좋아하는 웹툰 작가님의 스페이스를 들었다. 스페이스는 트위터의 개인 라디오 방송 같은 건데, 인스타그램의 라이브처럼 실시간으로 진행된다. 그날은 자기 전에 트위터를 켰다가 작가님께서 스페이스를 진행하고 계시는 걸 보고 냅다 스페이스에 참여했다. 스페이스는 때를 놓치면 다시 들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그때의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나는 방향이 불분명한 감사 인사를 남발하면서 스페이스를 들었다. 방송은 되게 좋았다. 작품의 비하인드를 들을 수 있었고, 작가님의 재미있는 일화나 만화를 그릴 때 하셨던 생각에 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방송에서 사과 게임을 알게 됐다. 작가님께서 요새 자주 하는 게임이라고 알려주셨는데, 게임을 소개하는 말이 재미있었다. 사과 게임이 궁금하시면 검색만 해보시고, 게임은 하지 마세요. 스페이스 중에 나온 얘기라 수첩에 사과 게임을 메모하면서 대체 어떤 게임이길래 경고 같은 소개를 하시는 걸까 아주 궁금했다. …진짜 궁금했다. 작가님의 게임 소개는 오히려 기묘한 추천으로 돌아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스페이스가 끝나자마자 사과 게임을 검색했다. 게임 자체는 굉장히 단순했다.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적힌 사과가 있다. 사과 위 숫자를 조합해 10이 되면 한데 묶어 날린다. 그게 끝이었다. 검색만 하고, 게임은 하지 마세요 - 나는 경고 같은 소개를 상기하면서 딱 한 판만 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33점. 곧바로 사파리를 닫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사과 게임과 작별하는 줄 알았는데.
사과 게임은 묘했다. 숫자 10을 만드는 게 전부인 그 게임이 자꾸 생각났다. 핸드폰에서 사파리로 접속하는 거라서 게임판이 작고, 터치하기 불편한데 앱은 없을까. 앱스토어에 들어갔다. 사과 게임을 검색하니 무슨 인싸들의 게임이라면서 앱이 하나 떴다. 요새 인싸들은 사과 게임을 좋아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게임을 받았다. 게임을 실행하니 UI가 달랐지만, 게임 화면이 훨씬 큰 덕에 사과가 잘 잡혀서 좋았다. 어? 괜찮은데? 이걸로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게임이 끝나고 광고가 떴다. 바로 앱을 삭제하고 사파리를 켰다. 형광에 가까운 초록 바탕에 빨간 사과가 잔뜩 떴다. 이거지. 이 색깔, 이 모양, 이 소리. 그날 몇 판을 했더라. 게임 한 판에 제한 시간이 2분이고, 광고 없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보니 총 몇 판을 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을 기억했다면 대충 유추할 수 있을 텐데 시간도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날 80점을 찍었다.
이 게임의 무서운 점은 나도 모르게 게임을 시작해 버린다는 것이다. 2분간 열심히 사과를 묶어서 날린다. 그리고 제한 시간이 끝나면 아쉬운 점수에 탄식하는 사이 새 게임이 시작돼 있다. 나의 오른손이 새 게임을 시작해버린 것이다. 경고 같던 소개를 생각해보면 작가님께서도 사과 게임의 중독성을 염려하셨던 것 같다.
2분은 정말 짧은데, 게임을 5판만 하면 순식간에 10분이 지나버린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 1시까지만 할까? 하고 돌아보면 1시 2분이고, 그럼 딱 1시 10분까지만 하자, 하고 돌아보면 1시 24분인 식이었다. 정말로 시간을 죽이고 싶을 때 최적인 게임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여선 안 될 시간까지 모조리 죽였다.
최근에 작가님께서 스페이스를 한 번 더 여셨다. 그날 스페이스에서 사과 게임의 꿀팁을 얻었다. 작가님께서는 아이패드로 사과 게임을 한다고 하셨다. 어쩐지. 핸드폰으로 하기엔 너무 작더라. 아이패드로 한 덕분일까. 딱 한 번 102점을 찍었다. 이후에 다시 비슷비슷한 점수가 나오는 걸 보면 요행이었던 것 같다.
나는 사과 게임을 할 때 멀리 있는 숫자를 조합하는 게 어려웠다. 더는 나오지 않을 것 같은데 왼쪽 구석에 1이 있고, 그와 닿을 수 있는 라인의 구석에 9가 있는 식이다. 그보다 더 숫자가 쪼개지면(1,2,1,2,3,1)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멀리 있는 숫자도 어렵지 않게 조합하게 되면 내 시야가 좀 트였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그건 좋은 현상이니까 한동안은 더 게임을 지속해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자제가 필요한 부분에선 자제를 발휘하면서 건강하게 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