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면서도 친근한 존재
친오빠랑 차를 타고 서울역 앞을 지나는 중이었다.
"야 염현지 너 기억나?"
"뭐?"
"난 예전 서울역 여기만 보면 너 생각밖에 안나"
"나? 왜?"
"너 어렸을 때 엄청 정의로웠는데. 엄마랑 순천에서 기차 타고 서울역 도착하면, 서울역에서 버스 타러 가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몰라. 네가 서울역 앞에 있는 거지들 너무 불쌍하다며, 울고불고 난리 치면서 집에 데려가야겠다고 생떼를 생떼를... 엄마랑 나는 서울역 도착하면 마음먹고 밖에 나갈 준비 했다니깐?"
"아... 맞다 나 그랬었지?"
남이 기억하는 나를 마주할 때가 있다. 남의 입에서 묘사되는 나는 낯설면서도 내가 잊고 지냈던 것들을 생각나게 한다.
평소에 나는 남이 평가하는 나에 모습을 경계하면서 사는 편이다. 남이 보는 나를 신경 쓰다 보면 어느새 그 이미지에 속박되어 온전한 내가 아닌 남이 규정한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오랫동안 난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인생에 최우선으로 두고 삶을 살아갔다. 사소한 선택 하나조차도 내가 아닌 남들이 생각했을 때 좋은 쪽으로 선택했다. 아주 오랫동안 남의 시선에 맞춰 인생을 살다 보니 어느새 내 인생에 '나'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깨달았을 때 세상 처음 느껴보는 허무함을 느꼈다. 진정한 '나'를 알아가는데 약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그 5년이라는 시간이 내게는 너무도 치열했고 막막한 시간이었다. 때문에 남이 말하는 나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었고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이 말해주는 나를 통해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하루는 고등학교 친구 3명을 만나 카페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아닠ㅋㅋㅋ 너 고등학교 때 염현지 기억나?"
"알지 알지 완전 모범생ㅋㅋ"
"모범생을 넘어서 진짜 기계 같았다니깐? 나는 쟤가 내 친구지만은 항상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왜왜?"
"내가 현지랑 일본 교환학생을 같이 갔잖아. 교환 마지막 날 같이 간 애들이랑 일탈 같은 것을 해보려고 맥주 몇 캔을 사 왔다? 그래서 선생님 주무시기 시작하면 제일 끝방에서 모이기로 했어. 근데 우리가 일탈하기 전 조건이 있었는데 같이 간 무용과 5명이 모두 동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어. 그래서 무용과 다 같이 한 방에 모여서 다 동의를 외치고 있는데, 아니 염현지가 갑자기 '나는 확실하게 말할게. 나는 술 안 마시고 싶어. 그러니깐 너희들은 마시고 싶으면 너희들끼리 가. 근데 확실하게 난 안 갈 거야'라는 거야. 그 순간 얼마나 분위기가 싸했는지 알아? 그때 내가 속으로 생각했지. 와 내 친구지만 진짜 우리 현지는 대단하다ㅋㅋ"
친구가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위의 사건을 완전히 까먹고 살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나 자신이 의견을 강하게 제시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단정했다. 때로는 왜 이렇게 나의 의견을 어필하지 못하나 자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친구의 기억 속에 있는 나를 통해 내가 깡다구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또한, 서울역을 지나면서 오빠가 이야기해준 나의 모습은 여태껏 나 조차도 잊고 살았던, 동정심이 많았던 순수한 '나'를 자각하게 해 주었다. 어느 순간 딱딱히 굳어 버린 나의 마음이, 오빠 기억 속에 있는 순수한 나를 통해 녹아내리는 듯했다.
남이 바라보는 나에 대해 듣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경계하면서 살다 놓쳐버린 나를 남이 기억해주었다. 그들의 설명은 마치 10년 전 내가 내게 부친 편지를 받은 느낌이었고, 오랜 다이어리를 꺼내서 읽은 것만 같았다. 오빠 덕분에 순수한 마음을 지녔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 덕분에 강단 있는, 자기 할 말 다 하는 겁 많은 모범생의 나를 만날 수 있었다.
남이 시선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어쩌면 남들이 내가 보지 못한 나의 다른 모습을 발견해주는구나.
내가 생각하는 나도 중요한 만큼, 나와 함께 한 남이 기억하는 나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낸 그들이 어쩌면 나 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산 증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남이 기억하는 나를 통해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