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과 겨울 어느 사이의 경주
경주.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나왔다면 한 번쯤은 수학여행으로 다녀오는 곳이었던 경주는 기차여행을 하며 가장 좋아하는 곳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만큼 새롭고 즐거웠다는 뜻.
성인이 된 후 처음으로 찾은 경주는 덥고도 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조금만 걸어도 땀이 주르륵 흐르던 그런 날이었다. 습한 날씨가 더해져 불쾌지수도 한껏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날씨와 상관없이 내 기억 속의 경주는 참으로 행복했다.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라면 단연 능 사이에 위치한 소나무 숲을 걸어가던 기억이었는데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그 더운 날 얼마나 달콤한지. 바람을 따라 걷다 보면 또 다른 능이 나오는 그런 풍경들을 많이 사랑했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시간에 가서 보랏빛이 될 때까지 걷고 또 걸었는데 그런 기억들이 나를 다시 경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날의 행복이 그리워서. 그리고 행복하고 싶어서.
코로나로 인해서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으니, 국내 여행지를 찾게 되는 수밖에 없는데 서울에 사는 나에게 '경주'라는 곳은 굉장한 시간을 들여서 가야 하는 곳이었다. '아껴두는 여행지'라는 변명을 핑계 삼아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여행을 즐겼다. 근교 여행을 하면서 나름 행복했지만 이상하게 삶과 비슷한 느낌을 받으며 새로운 영감을 간절히 도 원했고 나는 경주를 떠올렸다. 여행으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고 싶어 '퇴사'라는 큰 카드를 꺼내 들었던 때가 벌써 1년 하고도 수개월이 지나고, 코로나로 인해 꿈과 멀어져 가는 시간 동안 꽤나 괴로웠음이 틀림없다. 서울이라는 곳과 물리적인 거리를 두고 싶었고 그렇게 경주에 왔다.
이번 경주의 공기는 많이도 차가웠다. 한파주의보가 오는 날에 도착했기 때문. 반팔과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녔던 덥고 습한 경주가 아닌 건조하고도 차가웠다. 꽤나 늦은 시간에 도착했기에 해는 이미 사라졌고 어둠이 덮여있었다. 경주역에 들어온 불빛 만이 유일하게 내가 경주에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어둑해진 밤에 지나가는 차 소리만 고요히 울릴 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추운 날씨를 견디며 숙소로 걷는 중 눈 앞에 있던 떡볶이 집에서 모락모락 나는 연기에 이끌려 들어갔다. 사장님께서는 "안쪽으로 들어오이소" 라는 말과 함께 손짓하셨는데, 아주머니의 정겹고도 따듯한 사투리를 듣고 나서야 경주임을 실감했다. 어묵 국물을 호호 불면서 생각했다. 여름이 아닌 가을과 겨울 어느 사이에 있는 경주 또한 좋아하게 될 거 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