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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글도, 글씨도 못쓰는 사람이었다

내가 처음 쓴 글

by 내민해

어릴 때부터 나는 손글씨 쓰는 것을 좋아하고, 손글씨를 폰트화해도 되겠다는 과분한 칭찬을 많이 받아왔다. 회사에서도 업무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쓰는 편인데, 그때마다 같은 팀뿐만 아니라 타부서, 심지어 외부업체와의 미팅에서도 메모를 위해 펼쳐진 나의 다이어리 속 글씨체에 대한 뜻밖의 칭찬들에 놀라거나 민망할 때가 꽤 많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지독한 악필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과거형이 되어버린 이유와 현재형이 가능한 것은 노력의 결과라는 뜻이다. 사실 나는 엄마 덕분에 교정된 습관과 태도 같은 것들이 좀 많은데, 이를테면 예의라던가, 인사 같은 것들? 그 외적으로도 글씨체나 글쓰기, 말하는 법, 예절 등을 마치 교정하듯 바로잡아(지적해) 주셨다.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씨를 또박또박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고, 그 결실이 바로 지금의 내 글씨체가 된 것이다. 애매한 재능이 아니라 없던 재능이 애매하게 자리 잡힌 경우라고 해야 할까.


글쓰기도 그렇다. 처음으로 글쓰기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은 초등학교 백일장에서였다. 당시 주제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상상 속의 이야기를 소설처럼 풀어낸 글을 썼던 것 같다. 서두를 대화로 시작하면 호기심을 더 자아낼 거라 생각해 감탄사와 함께 친근한 어조로 글을 시작했다. 물론 "그렇게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하면 극적이고, 드라마틱 하겠지만, 아쉽게도 나는 우수상에 그쳤다. 하지만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나는 그전까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글이 상을 받을 정도의 글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지금은 책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나지만, 어릴 때의 나는 지금과 정반대로 책을 지독하게 싫어했다. 원래 공부도, 독서도 억지로 시키면 괜히 반항심이 올라오는 법. 그래서일까. 자꾸 책책책을 권하는 엄마의 강제성에 반항하고 싶었던 건지 일부러 책을 멀리하고, 심지어 기피하기까지 했었다. 그런 내가 글을 쓴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백일장의 우수상이었지만, 그때 엄마의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어라? 요것 봐라?'

놀람과 기특함이 묘하게 섞인 엄마의 표정과 반응에 나도 함께 웃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글쓰기 역사는 아마도 그게 시작이 아닐까 싶다. 그 후로는 신문부로도 활동하면서 글쓰기 재능까지는 아니었어도 대체로 쓰는 삶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도 일기장 한 권을 다 쓰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소소한 그날의 일을 쓰고, 기분에 따라 스티커로 마무리한 나만의 일기장은 차곡차곡 쌓여 지금도 부모님 댁, 내 방 책꽂이에 자리하고 있다.


"글쓰기를 배우려다 인생을 배웠다"는 독자들의 찬사를 받는 책 <글쓰기의 최전선>의 은유 작가는 글 쓰는 일이 작가나 전문가에게 주어지는 소수의 권력이 아니라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이 선택하는 최소한의 권리라고 말한다.


어쩌면 나에게 글쓰기란 계속해서 흔적을 남기는 행위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 당시의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흔적 말이다. 생산적인 결과물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목표 지향 문화에 반하는 삶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하달까. 그래서 글쓰기가 좋다. 잘하고 못하고를 판단하지 않아도 되니까. 물론 신춘문예 공모 같은 문단의 등용문도 존재하지만, 대체로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는 자신에 대한 탐구를 전제로 한 각자만의 이야기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나의 글쓰기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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