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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09. 2022

일단은 나부터 바로 서야지

드라마나 영화 속 클리셰처럼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다운 게 뭔데?"


그러게. 나답다는 게 정말 뭘까. 서른이 되면 어느 정도 나답게 잘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른을 넘어 서른셋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휘청대는 중이다. 삶이 너무 평탄하면 지루해진다고 했던가. 무료함이 지배하는 집단은 성장판이 닫힌다던 모 작가의 말처럼, 삶에도 주기적인 리셋이 필요하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특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감각에 예민하고, 타인의 감정에도 민감한 편인데, 그렇다 보니 가까운 이의 작은 감정 변화에도 꽤 자극을 받는 편이다. 그 사람이 슬픈 일이 있으면 내가 더 슬프고, 그 사람이 기쁜 일이 있으면 내가 더 기쁘달까. 굳이 그 사람이 쥐여주지도 않은 고민거리를 나 혼자 떠안고 가는 셈. 그래서 내 정신을 곧추세우지 않으면 감정이입에 매몰되어 나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다. 사실 요즘의 내가 조금 그랬다. 단단했던 자아가 자꾸 풀어헤쳐지는 느낌이랄까.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옳지 않은 남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듯 뱉어놓고선 정작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나를 오늘 아침에서야 발견하고 말았다.


'요즘 나는 어떤 상태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고 싫음을 내가 아닌 타인의 감정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렸을 때, 그 사람은 속상할까?', '나 때문에 힘들지는 않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내가 어떤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래된 관계일수록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이것이 자신의 생각인지, 상대방의 생각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내가 건강할 때는 그 구분이 명료해지지만, 위태롭게 서있을 때는 그 감각이 흐릿해져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과 실수를 하기도 하는 것이다.


10년 차 MBC 기자이자 휴직 후 춘천의 폐가를 고쳐 ‘첫서재’를 만든 서재지기 남형석 작가의 <고작 이 정도의 어른>에서 저자는 진짜 '나'로 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는 남들 눈에 멋져 보이는 나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나다운 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 과정을 뒤늦게 밟고 있다.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완성해나갈 때의 나. 글을 쓰고, 영상을 만들고, 그런 창조와 창작의 작업에 외로이 묻혀 있을 때의 나. 사화 생활보다 나만의 시간에 더 몰두하는 나. 1~2년 전부터 그렇게 매주 글을 쓰기 시작했고, 휴직을 하고 춘천에 있는 폐가를 고쳐 공유서재를 만들기 시작했다. 누가 돈을 주지도, 다른 달콤한 보상을 보장해주지도 않지만 이게 진짜 나인 것만 같은 순간순간이었다. 그렇게 지난해와 올해는 내 생애에서 가장 '완벽한 행복'에 가까운 시절로 남았고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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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추워지는 날씨 때문인지 몸도 마음도 슬슬 지쳐가는 요즘이다. 나는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인데, 이게 다 날씨 탓이라고 핑계를 대고 나에게 조금 더 여유를 선물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늘 어렵다. 안다고 생각했다가 꼭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다.


아 아직도 멀었구나. 나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는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어떤 날은 부끄럽고 유치한 나의 모습을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는 과정이 꽤 고통스럽기도 하고, 꼭 이렇게까지 나를 성찰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는 행위가 좋고 글을 쓰는 사람들도 좋다. 적어도 글을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게 남이 됐든, 내가 됐든, 상황이나 감정이 됐든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고여있지 않기 마련이다. 나는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주는 생동감을 좋아한다. 그 사람만의 고유한 색이 한 꺼풀씩 벗겨질 때마다 다음이 더 궁금해지는 사람들 말이다.


나답게 주체성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지만 가끔은 타인의 말들에 흔들리고, 옳지 못한 방향으로 흐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렇게 계속 쓰다 보면 천천히 나다운 모습을 다시 찾아갈 거라는, 글쓰기의 동력과도 같은 믿음이 있다. 그래서 지금의 이 시기도 훗날 돌아봤을 때, 그때의 시기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말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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