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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07. 2022

ㄹ하나가 이렇게 어려운 자음이던가

나는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이것저것 나만의 기준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편이다. 꼭 필요한 물건이 맞는지, 얼마나 쓸 수 있는지, 어디에 둘 건지 등을 꼼꼼하게 따져보고 마지막까지 구입을 망설이다 결제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비가 있다면 그건 바로 배움이다. 일정 수준의 자격이 부여되는 배움보다는 소소한 일상의 경험들 같은 것 말이다.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타이틀보다 경험 그 자체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고, 배움을 토대로 일상에 녹여낸 나만의 단단함이 좋았다.


그래서 요즘도 즐거운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시작한 지는 약 세 달 정도 됐는데 캘리그라피 클래스를 수강하고 있다. 캘리그라피 자격증반을 듣는 수강생들과 같은 시간대에 있다 보니 내가 연습하는 것과 다른 수강생들이 연습하는 내용이 다른데 나에게는 취미반이 딱 좋았다. 보통은 자격증을 따려고 수강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굳이 캘리그라피를 취미로 길게 배우는 나를 보며 그 이유를 선생님이 물어보셨던 적도 있었다. 나는 전문적인 타이틀을 얻고 싶다기보다 그냥 배운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글씨를 연구하며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 그 자체 말이다. 이 공방을 찾기까지 꽤 오랜 검색의 시간을 거쳤다. 보통 캘리그라피 클래스는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부수적으로 드는 여러 가지 고려 사항들(가격, 커리큘럼, 요일 등)이 나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찾은 이곳은 달랐다. 우선 개인 맞춤 클래스라 예약제로 운영되기 때문에 일정이 자유롭게 조율이 가능하고, 강의료도 횟수로 책정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의 잔잔한 가르침의 결이 나와 잘 맞다. 그 결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공방의 분위기도 정말 아늑하다. 공방 앞에 도착해 똑똑똑 문을 두드리고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공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것이 나와 잘 맞는 이번 배움을 생각보다 오래 지속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그 끝에는 자립이 있다. 나만의 글씨를 찾아 나만의 재능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캘리그라피는 그리스 어원으로 '아름다움'을 뜻하는 '칼로스(Kallos)'와 '서체'를 뜻하는 '그라페(Graphe)'의 합성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손으로 쓴 아름다운 글씨'라고 표현한다. 글씨의 크기, 모양, 입체감으로 글씨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도 있다. 나는 첫 수업에서는 펜 잡는 방법과 선 긋기만 2시간을 배웠고, 지난주에는 리을을 2시간 동안 연습했다. 리을 하나 쓰는데 이토록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손목을 쓰면 안 되고 팔 전체를 움직여야 글씨가 매끄럽게 써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손글씨만 또박또박 써왔던 나에게 캘리그라피는 조금 더 팔을 움직이는 글씨다. 손목으로만 까딱여서는 더 다양한 글씨를 쓸 수 없고 팔 전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야만 했다. 말하자면 게으르게 쓰면 안 되는 글씨였다.


요즘 <코스트 베니핏>이라는 소설을 읽고 있다. 우리말로 하면 가성비. 다섯 명의 작가가 들려주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나는 수록된 다섯 작품의 작가 중 김의경 작가의 말이 가장 좋았다.


내게 가성비 좋은 일이란 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일,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의 준말인 '가성비'는 언뜻 계산적인 말 같지만 감정과 연결한다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감정은 정확히 가격을 매길 수 없기 때문이다. 가성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 감정을 염두에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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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세대의 소비 특징 중 하나가 소유보다는 공유를 상품보다는 경험을 선호한다고 하는데, ‘가성비’보다 심리적 만족도를 중요시하는 ‘가심비’를 더 고려한다는 것이다. 나의 소비도 이와 비슷하다. 지갑을 여는 나만의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남들이 보기에 돈이 아깝다 싶은 것에 돈을 쓰기도 하고 반대로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 말하는 것에 돈을 쓰지 않기도 한다. 모두 저마다의 소비 철학이 다를 테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경험과 배움, 소중한 사람들과의 만남이고 그 과정에서 드는 비용은 내 기준에서는 가성비보다는 가심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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