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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Oct 31. 2022

타인의 슬픔에 더 민감해지고 싶다

오래전 한 글쓰기 강의에서 슬픔이 글쓰기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슬픔의 정서가 글로 승화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평소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그때그때 읽어야 할 목록에 추가해둔다. 호기롭게 적었다가 읽을 수 없을 것 같아 지워나갔던 책들도 있고, 속도는 더디지만 천천히 완독해 나갔던 책들도 있다. 그중 나의 책 목록에 꽤 오랜 시간 자리하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었는데, 바로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다. 슬픔이라는 정서에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나는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는 책 목록에 가만히 넣어두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책은 꽤 유명한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신형철 평론가도 유명한 작가였고, 그의 글이 담고 있는 무거움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이 되어주기도 했다.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소개한 사람이 여럿 있었고, 그때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혼자 되뇌다 이제서야 그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아직도 읽고 있는 중인데 굉장히 느린 속도로 꼭꼭 씹으며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중략)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타인의 슬픔에 이토록 민감하게 공감하고 있음에도, 공감이 정말 어려운 것이라 말하는 신형철 평론가의 겸손과 섬세한 필력에 반하고 말았다. 단순히 슬픔만을 다루고 있지 않고, 그 슬픔의 밑바탕이 되는 굵직굵직한 사건까지 가감 없이 파고드는 그의 통찰력과 철학적인 문체도 좋았다. 어떤 문장은 한 번에 이해가 가지 않아 읽고 또 읽었고 이 글을 이해하는 속도만큼 이 책을 더디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원래도 남들보다 글을 읽는 속도가 느린 편인데 이 책은 더했다. 어떤 문장은 그 깊이가 너무 깊어 눈물을 삼키기도 했고, 또 어떤 문장은 날카롭고 신랄한 그의 비판에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얼마 전에 그의 신간이 나왔다. 계속 예약 판매 중이었다가 바로 오늘(10월 31일)부터 판매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무려 4년 만의 신작이라고 한다. <인생의 역사>라는 책인데, 한 편의 시를 읽고 시를 나누는 이야기라고 한다. 시를 함께 읽자거나 그 독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닌, 저자가 겪은 삶을 시로 받아들이고 시를 통해 인생을 겪어내는 이야기라고 한다. 그 책에서 저자는 말한다.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라고.


그는 문학평론가이자 작가다. 올해 여름까지는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비평론을 가르쳤고, 현재는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교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최근에 이 책과 관련해서 가장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신형철 작가에 대해 몰랐던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물론 내가 그 진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겠지만, 이런 후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여지가 있다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서 조금 씁쓸했다.

나는 평론가라는 직업의 자질과 소양 같은 것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공과 사로 구분해야 할 일을 친분 때문에 지적하지 못한다는 것은 꽤나 실망스러운 일이다. 누가 봐도 잘못한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두둔하는 것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일 테고, 때로는 그 이해관계 때문에 누군가의 글은 신뢰를 잃기도 하니까 말이다. 단순히 신뢰를 잃는 것에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모든 것들을 부정당하는 느낌일지도. 마치 지난달 개봉했던 '성덕'이라는 독립영화 속 주인공의 허탈감처럼 말이다. 아직 나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지난 주말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세월호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를 가져온 안타까운 사고다. 어떠한 말도 덧붙이기 조심스러울 만큼 마음이 먹먹했던 주말이었다. 연일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여러 말들이 오간다. 부디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기 어렵다면 말이라도 조심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번 일로 고통받고 있는 모든 분들이 무사히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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