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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11. 2022

그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비명제적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얼마 전에 읽었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의 저자인 신형철 평론가가 북토크에서 했던 말이다. 우리는 종종 명제적 지식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가 있다. 흔히 말하는 "그거 해서 뭐 할 건데?"와 같은 질문은 아마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겠지. 비명제적 지식은 어떠한 상태인지는 아는데 설명은 잘 안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게 얼마나 좋은지는 아는데, 이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슬픔을 마주할 때 그 슬픔에 가치판단을 시작한다. '그게 울만한 일이야?', '슬퍼할만한 일이야?'라고 말이다. 전직 기자였고 평소 르포 형식의 글을 잘 쓰는 장강명 작가는 신형철 평론가와의 북토크 중 가치판단 없이 타인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이를테면 살인자가 자신의 죄를 갑자기 뉘우치는 척하며 슬퍼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냐는 다소 극단적인 예시를 들어가며 말이다. 하지만 범법행위는 아무리 슬픔의 가치를 부여한다 해도 절대 공감할 수 없고, 슬픔의 범주에 넣어서는 안 되는 극단적인 예시기에 차치하고.

타인의 슬픔에 대한 가치판단, 사실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신형철 평론가는 그렇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의 슬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그 슬픔에 가치판단을 시작하는 순간 나는 그 슬픔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슬픔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사랑을 함수 공식으로만 접근하려고 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처럼 말이다(저만 그런가요?).


글쓰기를 지속하는 동력을 소개하기 위한 서론이 굉장히 길었는데, 그래서 내 결론은 사람이다. 계속해서 써 나갈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덕분일 것이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을 너무나 사랑하는 철저한 내향인이자 개인주의자는 맞지만 그렇다고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한 명 한 명 제각각 너무도 특별하고 고유하다. 설령 그 고유한 존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들에 비슷한 부분이 있을지언정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


9명의 작가가 글 쓰는 마음에 관해 쓴 책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에서는 쓰고 싶으면서도 또 쓰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감정의 사유를 가감 없이 풀어낸다. 그중 이다혜 기자는 '쓰지 않은 글은 아직 아무것도 망치지 않았기 때문에 쓴 글보다 사랑하기 쉽다'라고 말한다.


누가 억지로 시킨 일이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세상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글이 있다. 나만 쓸 수 있는 글이 있다고 믿고 싶지만, 글이 완성되기 전에는 정말 그런지 알 도리가 없다. 고민하는 동시에 글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니 하고 싶다든가 하고 싶지 않다든가 하는 말은 도움이 안 된다. 대체 어쩌란 말인가.
(중략)
하지만 쓰지 않은 글의 매력이란 숫자에 0을 곱하는 일과 같다. 아무리 큰 숫자를 가져다 대도 셈의 결과는 0 말고는 없다. 뭐든 써야 뭐든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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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한 뭔가를 이루어내고자 글쓰기를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다. 늘 말해왔지만 나는 나를 치유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은 골방에서 혼자만의 글을 쓰던 내가 조금씩 문을 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늘 사람이 있었다. 치유하고자 했던 첫 번째 대상은 바로 나였고, 그다음은 없었다. 어느 누구를 향하고 있지도 않았고 그저 내가 살아가면서 느끼고 경험한 모든 사유를 조금씩 펼쳐 나가는 과정이 켜켜이 쌓여 여기까지 온 것이다. 때로는 쓰고 싶지 않았다. 입을 꾹 닫고 아무 말도 뱉어내고 싶지 않은 날처럼, 아무 글도 쓰고 싶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은 더 많이 읽었다. 채워지면 또 뱉어내고 싶어질 거라 생각했고 그렇게 채워지면 다시 글을 써 내려갔다. 알 수 없는 낱말들을 나열해가며 두서없이 써 내려가던 날도 있었고, 말로 받은 상처를 글로 풀어내며 나를 다독이는 글을 써 내려가던 날도 있었다.


그 중심에는 늘 사람, 내가 있었고 당신이 있었고 또 다른 익명의 누군가와 누군가, 그리고 누군가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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