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
25살에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중간에 이직을 하면서 방향을 틀었던 경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상사를 만나 '세상에 이런 이상한 사람도 존재하는구나'를 온몸으로 느낀 적도 있었다. 나의 직속 상사는 대체로 여자분들이었고, 어떤 이는 이성적이고, 어떤 이는 감정적이었다. 이성적인 상사는 다정함은 없지만 일을 함에 흐트러짐이 없어 내가 따르기 좋았고, 감정적인 상사는 자신의 감정 기복에 따라 일이 줄거나 늘거나 칭찬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들쑥날쑥 그녀의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다. 후자의 경우로 이직을 결심했던 적도 있었는데, 나 하나 괴롭히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을 상대하기란, 특히 내 상사가 그런 마음을 갖는 경우 삶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중 직장이란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인데, 그 대부분을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참 불안하고 괴로운 일이니까.
그렇게 수많은 빌런들을 거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단단해지기도, 독해지기도 하면서 점점 표정을 숨기고, 일할 때만큼은 차가운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업무에 있어 감정을 크게 담지 않고, 합리적이고 정확하게 일을 마무리한다면 아무리 내 윗사람이 말 같지도 않은 일로 트집을 잡아도 내가 누릴 수 있는 타당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지금의 팀장님을 만났다. 작년에 국장님이 정년퇴직을 하시고, 우리 재무국은 재무회계팀으로 조직개편이 되면서 팀장님이 새롭게 오신 것이다. 나와는 10살도 채 차이 나지 않는 분인데,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남자 상사분이다. 사실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회사 생활이 천국이 되기도, 지옥이 되기도 하는 것을 경험했던 나는 초반만 해도 날을 세웠던 것 같다. 아무리 팀장님이라도 내가 먼저 입사했다는 이유로 텃세를 부리려던 것은 아니고, 그저 담백하게 나의 할 일만 똑 부러지게 하는 직원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 분은 알면 알수록 정말 괜찮은 분이었다. 단언컨대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어떤 상사보다 가장 괜찮은 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굉장히 젠틀하시고, 일 머리도 뛰어나시며 무엇보다 팀원들의 의견 하나하나를 정말 깊이 존중해 주신다. 역할을 부여할 때도 절대 일방적으로 주지 않고 나의 의견을 충분히 묻고 함께 이야기하면서 방향을 정해가신다. 다른 국의 국장님들이나 팀장님들이 우리 팀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떠넘기려 할 때도 늘 우리의 방패가 되어 그 일을 막고 합리적으로 결정해나가신다. 특히 개인주의자인 나는 단체생활을 참 싫어하는데 그런 나의 성향까지 고려하셔서 절대로 회식이나 단체 활동을 강요하지 않고 필수가 아닌 선택임을 강조하신다. 행여나 내가 소외감을 느낄까 싶어 회식이 끝나고 내 음료만 따로 사 와서 챙겨주실 정도로 자상하고 섬세한 분이다. 이분은 직장 상사를 떠나 인간적인 성품만 봐도 닮고 싶은 부분이 정말 많은 분이다. 일머리도 좋은데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정성스럽다. 우리 회사에서 이분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 정도로 평판도 좋으시다.
10년 차 MBC 기자이자 휴직 후 춘천의 폐가를 고쳐 ‘첫서재’를 만든 서재지기 남형석 작가의 <고작 이 정도의 어른>에서 저자는 잘나가던 팀원이 나쁜 팀장이 되는 이유에 대해 주인공 의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어야 하겠지만 팀의 주인공은 명백히 '팀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다.
굳이 포기할 거면 그전에 조언이라도 해드리고 싶다. 실천할 수 있는 것 중에 꽤 쉬운 게 하나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끝까지 잘 듣는 일.' 그게 시작인 것 같다. 후배들에겐 귀를 더 열고, 대신 입은 아랫사람이 아닌 윗사람에게 더 여는 사람이 된다면 조금씩 팀과 회사의 분위기가 달라질 것 같다. 후배들의 같잖은 얘기도 자꾸 듣다 보면 가끔은 이해가 될 거다. 그 얘기가 '같잖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언젠가 이르게 될 수도 있다. 그 어쭙잖은 생각들을 모아서 보석처럼 빛내주는 역할을 당신은 해낼 수 있다. 능력 있는 사람이니까. 당신의 꿈을 펼치는 도구로 팀장이라는 자리를 활용하는 것보다 나은 방식 아닐까?
깃발 들고 무작정 뛰는 습관 대신 후배들을 믿고 후방 지원을 해주는 습관만이, 팀을 당신이 올려놓고 싶은 그 자리에 올려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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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은 참 귀한 일이다. 그 어른을 보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은 아닐 테니까. 하물며 곁에 있는 이에게 그런 마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 아닐까. 내가 만난 지금의 우리 팀장님은 알면 알수록 정말 현명하고 다정하신 분이다. 이 분은 이 직장을 떠난다 해도 계속 연락이 닿았으면 할 정도로 좋은 어른의 모습을 갖고 계신다. 지금의 이 모습이 변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본다.
+ 회사에서 연말을 맞이해 올 한 해 고생한 동료를 추천하는 시상식을 마련했다는 공지글을 읽었다. <나는 이분에게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하는 동료의 이름을 적어 따뜻한 메시지, 격려의 메시지, 응원의 메시지 등을 남기면 가장 많은 응원을 받은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해주는 따뜻한 시상식이다. 나는 감사한 마음을 담아 팀장님을 추천했다. 1월 중순에 발표라고 하는데 나 외에 다른 분들도 팀장님의 이름을 많이 적어 꼭 당첨되셨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