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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13. 2023

생각보다 나약한 사람

보이지 않는 노력은 늘 필요하다

한동안 헤어밴드를 쓰고 문장들을 쏟아 놓은 뒤 헤어밴드를 벗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했다. 시시한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영혼이 침식되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는 횟수가 늘어났다. 헤어밴드는 짧으면 하루에 네다섯 시간, 길게는 여덟 시간 가까이 착용했다. 술을 마시고 헤어밴드를 착용하는 날이 생겼고, 나중에는 거의 매일 그렇게 했다(지금 이 글도 그렇게 쓰고 있다).

<일은 놀이처럼, 놀이는……> 장강명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장강명 작가와 동명이인이다. 그가 주인공을 앞세워 본인의 경험담을 돌려 말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은 부분이 은근히 많아 읽으며 살짝 혼란스럽기도 했다. 우울증 약을 먹으며 창작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주인공은 점점 더 헤어밴드의 기능에 의존하며 자신을 파괴시켜 간다. 문제는 자신이 그것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꾸 합리화시키며 벗어날 생각보다는 이 실험기계의 유용성과 정당성을 설파하는 느낌마저 든다는 것이다.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알고 있는 기쁨이 있다. 잊고 있던 나를 다시 찾은 것만 같은 충만한 기분 말이다. 삶에서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생각한다. 나는 나의 페이스를 스스로 찾는 사람인가, 아니면 무언가에 의지하는 사람인가. 이것저것 시도해 가며 자신만의 페이스를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무언가가 중독성이 강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유명 작가들 중에도 마약에 의존해 소설을 집필하고 이를 떳떳하게 밝힌 경우가 더러 있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프랑수아즈 사강'이다. 그녀는 10대 후반에 클럽을 드나들고, 흡연과 알코올, 마약에 중독되어 재판을 받을 때조차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여러 작품을 읽었고, 꽤 괜찮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들을 옹호하려는 마음은 없다. 다만 그만큼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아니 꼭 창작의 고통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도 어쩌면 무언가에 집착하듯 의지할 곳이 있어야만 지탱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종종 삶이 휘청거릴 때가 있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변화 혹은 고난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 나는 그럴 때마다 익숙한 장소를 찾았다. 누군가를 만나는 건 오히려 독이 됐다. 그저 내가 평소 편안함을 느껴왔던 장소에 나를 넣어주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진정되곤 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서점, 조용한 카페, 도서관 등이었고, 이런 걸 흔히 '심리적 안전지대'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은 좋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고립되고 싶지는 않고,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감각을 느끼고 싶을 때면 어김없이 나만의 심리적 안전지대를 찾았다. 그곳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여기저기 부유하던 생각과 감정들이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장거리를 완주하기 위한 나만의 쉼표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좋은 공간을 주기적으로 리스트업 한다. 길을 걷다 마음에 드는 카페가 보이면 한 번 검색해 보고, 낯선 동네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보석 같은 공간들에 시선을 빼앗긴다. 지난 주말에는 경복궁역에서 시작해 광화문까지 걸어가면서 골목 사이사이에 즐비한 좋은 공간들을 여럿 발견했고 나만의 플레이스에 가만히 저장해 두었다. 저 공간을 방문하게 될 날이 언젠가 찾아올 것이라 기대하며 나만의 안전지대를 넓혀간다. 그렇게 마음은 한결 차분해진다.


'일은 놀이처럼, 놀이는……"이라는 장강명 작가의 단편은 <놀이터는 24시>라는 책에 수록된 여러 편의 소설 중 한 작품이다. 그 책을 읽고, 뒷얘기가 궁금해 책과 관련된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었다. 그 인터뷰에서 장강명 작가는 즐거운 순간을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수동적으로 찾아오는 즐거움은 대체로 일차원적이고, 가볍고 얇으니까. 그가 말하길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쾌감만 있는 상태'가 온전한 즐거움의 영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렵게 얻은 것에서 더 큰 행복과 입체적인 만족을 얻는 것처럼 나만의 페이스를 찾는 것도, 단순한 행동보다는 조금 더 복합적으로 나를 이해하고 준비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팔 개월 동안 꾸역꾸역 썼다가 지웠다가 하며 원고를 단행본 한 권 분량만큼 썼다. 전에는 '글이 안 써진다.'라며 자기혐오에 빠졌는데, 이제는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글'이라는 생각에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설원에서 길을 잃은 사람이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믿으면서 실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진 방향으로 걷는 바람에 커다랗게 원을 그리고 끝내는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하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제 단순히 무언가를 쓰는 것의 문제를 넘어 글 다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진다. 이건 마치 공부하려고 앉아있는 시간이 길다고 해서 그 시간을 온전히 공부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한 것과 같은 논리가 아닐까.



헤어밴드를 착용했을 때 내가 '의식의 문'을 지나 깊고 비밀스러운 의미에 이른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파티에서 술에 살짝 취해 흥이 오른 사람들이 별 대단치 않은 내용의 수다를 길게 늘어놓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웃음을 터뜨리는 쪽에 가깝다고 느꼈다. 헤어밴드를 쓰고 있으면 여전히 즐거웠다. 그러나 헤어밴드를 벗으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에 의지한 채 창작의 희열을 맛보고 이를 놓지 못했던 주인공의 모습처럼, 꼭 창작이 아니더라도 고통을 이겨내고자 술과 약에 의지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여럿 보았다. 그건 말 그대로 중독에 가까웠고 굉장히 위태로워 보였다. 내가 술을 멀리하는 이유도 어쩌면 내가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라는 걸 익히 알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습관을 잘 만드는 나는 좋은 습관도 빠르게 정착시키지만, 나쁜 습관 또한 마찬가지 속도로 정착시켜 버린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자면 나의 첫 직장은 늘 업무가 많았고,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날도 꽤 잦았다. 문제는 그렇게 늦은 시간에 귀가해도 쉬이 잠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매일 독한 술을 찾았고 그걸 마셔야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 잔만 마셔도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점점 내성이 생기는지 한 잔으로 취하지 않았다. 더더 강도를 높이다가 이내 '이건 아니다' 싶은 지경에 이르고 나서야 건강의 적신호를 발견했다.


나를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대체로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다. 물론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만큼 보여지지 않는 노력이 많았다. 극도로 예민한 사람임에도 예민하게 보인 적이 없다는 건 그만큼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이고, 중독에 취약한 사람이지만 또렷한 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는 건 그만큼 내가 절제하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나는 나만의 페이스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늘 나의 모습을 돌아보고 점검한다. 가장 평범한 게 실은 가장 어렵다는 걸 매 순간 기억하려 노력한다.


나의 글을 꾸준히 읽어왔던 친구 중 한 명은 내 글은 잘 읽혀서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독성이 좋다고, 공감이 잘 된다고 말이다. 자신은 그렇게 쓰기가 어렵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그 친구의 말에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지만, 친구는 알고 있을까. 내가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지를 말이다. 읽고 또 읽고, 수정하고 또 수정해도 고작 이 정도라 생각하고 발행 버튼을 누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농담이 아니라 몇 십 번은 읽고 또 읽는다. 보여지는 노력이 다가 아닌 순간이다. 즉흥적으로 썼던 글을 즉흥적으로 올렸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댓글 하나를 쓸 때도 몇 번을 고치고, 또 고친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작은 선택지 하나도 허투루 고른 적이 없다. 홧김에 실수라도 할까 봐 감정이 격해졌을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삼켰다. 마음의 평정심을 찾은 후에야 한 마디씩 차근차근 나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 모든 노력들이 내 삶의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한 나만의 방법들이다.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나를 섬세하게 다듬어가는 이 노력을 게을리하고 싶지가 않다. 혹자는 뭘 그렇게까지 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닌 내 스스로에게 떳떳하기 위해서라도 나를 잘 키워내고 싶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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