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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20. 2023

지나가던 어느 J의 이야기

독서는 한 달에 스무 권 정도로 정한다. 더 많이 읽으면 밀도가 낮은 독서가 되거나, 허튼 책을 고르게 된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책을 즐기며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한다. 오랜 습관대로, 어딘가 갈 때 꼭 인쇄된 활자를 들고 다닌다. 근본적으로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읽는다. 책으로 만들어진 활자는 대체로 멍청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신중하다. 떠드는 말이나 근본 없이 돌아다니는 글보다는 낫다.

<제법 안온한 날들> 남궁인



남궁인 작가의 에세이에 담긴 여러 문장 중 내가 좋아하는 문장이다. 작년인가 이슬아 작가와 남궁인 작가의 서간에세이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를 읽고, 남궁인 작가 특유의 궁상스러움과 해명하는 듯한 문장이 귀엽고 친근했는데 이 책에 담긴 문장들도 하나하나 좋았다.


그는 응급의학과 의사로 치열한 삶의 현장을 매 순간 마주하고 있다. 일분일초가 급박한 상황. 잠깐 머뭇거리다 한 생명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촌각을 다투는 일. 그게 그의 삶이다. 책에는 자신이 만났던 여러 환자의 증상과 에피소드가 담겨있었는데, 조금 다른 의미로 나는 그 상황보다는 남궁인 작가의 삶을 가만히 생각해 보게 됐다. 얼마나 바쁘고 숨이 찰까, 심장이 떨릴까. 잘못된 한 번의 판단, 잠깐의 머뭇거림, 이어지는 실수 등 꾸물거릴수록 상황이 악화되는 것만 같은 그 긴박함 말이다.


그의 삶은 하나도 안온하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법'이라는 부사처럼, '제법' 안온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술실을 떠난 그의 삶은 대체로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두 가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수술실에서는 즉흥적이라면 즉흥적인 그의 모습, 자신의 일상에서는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과 노력을 쏟으며 삶을 가꿔가는 모습. 그렇다면 그는 즉흥적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 나는 그동안 즉흥적이라는 단어에 꽤나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으나 그의 즉흥적인 판단이 직업적으로는 꼭 필요한 소양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소위 말하는 즉흥적이라는 말과는 결이 살짝 다르긴 하지만, 내가 느낀 즉흥적임은 빠른 판단도 포함하고 있으니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나는 계획적이다. 때로는 그 계획이 지나쳐 독이 되기도 한다. 잘 하려고 만들어둔 계획이 어느 순간 나의 발목을 잡고, 잘 하는 것보다 계획을 달성하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앞뒤가 뒤바뀌고야 마는 아이러니한 상황들. 하지만 이 이상한 상황들이 내 삶 곳곳에 너무나 당연하게 녹아있어 더 이상하다. 이상한 걸 아는데, 바꾸지는 못하는 모순덩어리 그 자체. 그야말로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가 아닐까 싶다. 종종 나를 보며 '걸어 다니는 시계'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친)오빠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 '자기 관리의 신'이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 놀랐던 적도 있었다. 계획이 지나쳐 독이 된 케이스.


사실 관계에서도 계획적인 나의 모습 때문에 상대와 부딪칠 때가 있다. 대체로 한 번 정한 약속은 정말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잘 바꾸지 않는 편이며, 혹여 바꾸게 된다 하더라도 상대에게 충분한 이유와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나 혼자 계획을 바꾸는 건 상관없지만, 누군가와의 약속을 어기는 건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 여기는 나의 오랜 가치관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계획적인 인간입니다"라는 글을 쓰려다 말이 점점 길어지는 느낌인데, 나에게 계획이란 시간과도 연결되어 있기에 더 중요한 가치인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다. 어릴 때는 지독할 만큼 더했다. 처음 직장 생활을 할 때만 해도, 그날의 할 일들을 미리 다 촘촘히 계획해 두고 일과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사방에서 팡팡 터질 때마다 우왕좌왕하는 내 모습에 이건 아니다 싶었다. 너무도 다양한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 나만의 계획을 고집할 수만도 없었고, 무엇보다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ㅋㅋㅋㅋ).


사회인으로서 나는 계획적이지만, 마냥 계획적이지만은 않은 사람.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제안과 변화에 충분히 단단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으로 길들여졌다. 이제는 여행을 갈 때도 혼자 가는 여행이 아닌 이상 지나치게 계획을 짜지 않는다. 이건 귀찮아서가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다(자꾸 일정 바꾸지 말라고ㅠㅠ). 그렇게 태초부터 J형이었던 나는 서서히 P형으로 갈듯 말듯 하지만, 혼자만의 삶에서는 여전히 J다. 선명하고 굵은 고딕체의 J. 아 아니 궁서체인가.

나 진지해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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