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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23. 2023

아직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니 더 조심해야지

나는 호흡기가 좋지 않다. 정확히는 호흡기를 가리는 걸 무서워한다. 비염처럼 어떠한 증상이 있는 건 아니고,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폐소공포증이 있다. 밀폐된 공간인지 모르고 들어갔다가 그 공간을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숨이 막히면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다. 가령 치과 치료를 받을 때도 소공포(가리개)로 얼굴을 덮지 못하고, 잘 때도 이불로 얼굴을 덮지 않는다. 체력이 받쳐준다 해도 인형탈 아르바이트는 시도해 볼 엄두조차 낼 수 없으며, 낯선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잘못 탔다가 고소공포증과 폐소공포증이 동시에 발현되는 끔찍한 상황을 겪기도 한다.


이런 나에게 마스크라는 건 꽤나 불편한 물건이었다. 코로나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는 초미세먼지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호흡기의 건강 때문에 마스크를 챙겨 쓰는 이들도 종종 봤었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단호했다. 건강이 아무리 나빠져도 입과 코를 가린다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미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코로나'라는 생소한 단어가 본격적으로 일상에 젖어들기 시작한 건 2020년 초였다.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중국 전역과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고, '확진자', '전파자', '동선' 등 낯설게 들려오는 단어들에 연일 뉴스가 시끄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때까지도 해도 그 상황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회사에서도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는 지도를 공유하거나 감염 예방 수칙을 배포하는 등의 소소한 대응을 이어가고 있었다. 자녀가 있는 직원들은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의 건강을 챙기고자 누구보다 발 빠르게 마스크를 대량 구매했지만, 호흡기가 막히는 게 싫었던 나는 그 상황조차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주말이었다. 평소와 같이 독서모임을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향하던 중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지?'

낯선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는 잘 받지 않는 편이라 신호음이 끊어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신호음이 멈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모임장님이었다(생각해 보니 나 모임장님 번호도 몰랐구나).

'어라?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시지?'

궁금한 마음에 답장을 하려던 찰나 이어지는 모임장님의 문자에 손가락이 멈췄다. 오늘 갑자기 확진자 수가 늘어나 모임을 신청하셨던 모든 분들이 당일 취소를 하는 바람에 모임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내용은 혹시 모임 장소로 오고 있는 중이냐고,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문자를 받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칸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나였고, 바로 그 무렵이었다. 2020년 2월 18일, 대구 경북 지역에 첫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두 자릿수였던 확진자 수가 하루 수백 명씩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점 말이다.


일상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긍정적인 소식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고 이 혼란함을 온 국민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연일 쏟아지는 무서운 뉴스와 기사에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흘러갔다. 이러다 지구에 종말이 찾아오는 게 아닌가 싶어 두려워졌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사실조차 공포스러웠다.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감염자처럼 느껴졌고 낯선 이가 말을 걸기라도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다. 마스크 5부제, 특별재난지역, 온라인 개학, 긴급재난지원금, 생활 속 거리두기 등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단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감염이라도 되는 날에는 온 동네가 떠들썩할 정도로 잡혀(?) 가는 건 시간문제고 동선까지 모두 공개된다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나돌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 하나 희망이 없어 보였다. 치료제도 백신 개발도 이제 막 연구에 돌입했다는데 언제쯤 만들어질지, 아니 만들어지긴 할 수 있을지, 단기간에 만들었다가 부작용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게 되면 어쩌나. 하지만 그건 앞으로 불러올 재난의 서막에 불과했다. 호흡기가 불편해 마스크를 쓰지 않으려던 나의 몸부림조차 사치처럼 여겨졌다. 마스크 대란을 심하게 한 번 겪은 뒤로는 없어서 못 쓰는 게 마스크라는 생각에 구할 수 있을 때 다급하게 채워두기 바빴다.


이제 그로부터 3년 4개월이 지났다. 5월 11일, 이제 우리나라도 코로나 19의 엔데믹을 선언했다. 중앙방역대책본부는 다음 달 1일을 기점으로 코로나 19 위기 경보 수준을 '심각'에서 '경계'로 하향 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근데 오히려 이 상황들이 더 낯설게 느껴졌다. 코로나와 함께했던 기간 동안 우리 삶에 코로나라는 전염병이 너무나 익숙하게 자리 잡아버린 것이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원래의 삶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원래 길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걸어 다니는 모든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식당에 가도 카페에 가도 온갖 곳에 사람들이 와글와글했다. 심지어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외국인 관광객들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야 서울 같았고, 이제야 명동 같았다. 사람들이 뿜어내는 생동감 있는 열기가 다소 뜨겁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왠지 모를 안정감이 찾아왔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가 없던 시절을 서서히 기억해갈 것이다. 이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과 이 시기에 입학했던 학생들은 한동안 적응기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응기가 그리 길지는 않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공공의 적에 빠르게 대응했던 그때처럼, 긍정의 변화에는 더욱더 빠르고 익숙하게 적응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건 나는 그 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확진자와 동선이 겹친 적도 없었기에 자가격리도 PCR 검사도 경험해 보지 못했다. 혹시 몰라 자가키트로 코를 찔렀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 한 번도 코로나와 직접적으로 대면한 적은 없었다. 건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전염병도 잘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지나치게 청결을 강조했던 나의 오랜 습관 덕분일까. 뭐가 되었든 이 질긴 시기를 잘 버텨준 나 자신에게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정말 끝이 보인다. 아득하게만 느껴졌던 코로나라는 녀석과의 작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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