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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02. 2023

가깝고도 먼 우리 사이

내가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제가 기계치라서요."


나는 휴대전화와 노트북, 최신 기기 제품 등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새로운 기종의 출시나 요즘 흔히 떠오르는 챗GPT도 아직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유행에 기민하지 못해 남들이 당연하게 알고 있는 것들을 모를 때도 많았고 한참이 지난 뒤에야 요즘 트렌드가 뭔지 아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말인즉슨 나는 기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건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기본에 충실한 것을 좋아하는 타입이라 발을 넓히지 않았을 뿐이지 최소한의 기능들은 짜임새 있게 잘 사용하는 편이다. 어떤 물건이든 되도록 오래 쓸 수 있는 것을 선호하고 말이다.


처음 카카오톡이 생겼던 때를 기억한다. 문자에서 카카오톡으로 넘어갔던,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넘어갔던 격동의 시기 말이다. 당시 나는 대학생이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카카오톡 어플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1의 존재여부에 굉장히 흥미로워했다. 하지만 나는 읽지 않음을 표시하는 그 1이 싫어 계속 문자를 썼다. 읽었는지, 읽지 않았는지, 읽었는데 왜 대답하지 않는지, 어쩜 그럴 수 있는지 등등 재촉하는 듯한 상대의 물음표에 일일이 대답할 여력이 부족했던 나는 당시의 신문물(?)에 합류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참다못한 주변에서 "제발 좀 깔아라"라는 핀잔을 듣다 듣다 못 이기는 척 카카오톡이라는 세계에 입성했지만 여전히 별로였다. 그 숨 막히는 1의 여부로 당시 사귀었던 연인의 집착 같은 연락에 나는 결국 "소름 끼친다"라는 표현을 해버리고야 마는 악순환.


세상은 점점 빨라지고 생활은 더 편리해진다. 느린 것은 답답한 것이고 신속하고 간결한 답변을 바라는 지금의 우리. 머뭇거릴 틈이 없어 지체되는 그 시간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는 숨 막히는 속도감에 나는 가끔 숨이 찬다. 귀찮아서 생략하는 말로 불거지는 무수한 오해와 균열이 나는 싫다. 그 차가운 공기가 싫어 궤도를 이탈하면 누군가의 손에 강제로 다시 줄 세우기가 시작된다. 말과 행동을 하기에 앞서 생각할 시간과 머뭇거림, 배려, 양보, 조심, 존중 등의 가치를 필요로 하는 나는 답답하다는 상대의 다그침에 결국 도망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계와 나의 관계는 여전히 미지근한 상태라 말하고 싶다. 내 방에는 노트북과 휴대전화, 이북 리더기, 블루투스 이어폰, 갤럭시탭 등 삶의 질을 높이는 기기들이 즐비해있지만 딱 거기까지. 더 나은 기능을 바라지도 않고, 더 알고 싶은 욕심도 없다. 내가 아는 기능만 사용하고 싶고 더 넓게 알기에는 내 에너지 총량이 부족하다.


손글씨를 좋아해서 작년부터 캘리그라피를 꾸준히 배우고 있고, 더 다양하게 배워보고자 디지털 캘리그라피로 영역을 넓혔다. 사용할 수 있는 어플을 이것저것 검색하다 다 쓸 수도 없는 방대한 기능들(붓 종류가 대체 몇 개야)에 학을 떼며 기본에만 충실한 것을 찾는 나를 과연 기계와 친하다 말할 수 있을까. 단지 기계처럼 쓸 수 있는 간단한 도구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엑셀도 딱 필요한 함수만 알고 있다. 휴대전화도 쓰는 기능만 단조롭게 쓰는 편이라 최신 기종이 출시돼도 시큰둥하다. 내가 휴대전화를 고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첫 번째로는 방수(손을 자주 씻는 편이라), 두 번째로는 자판이 버벅거리지 않는지(핸드폰으로 글을 쓰거나 메모하는 경우가 많아서), 세 번째로는 무게와 가격(이 작은 기계에 큰돈을 투자하고 싶지 않다)이 있다. 이 외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통화음이 괜찮고 자판이 물리지 않고 배터리가 너무 빨리 닳지 않는다면 더 좋고.


조금 다른 의미로는 SF 소설은 나와 잘 맞지 않다. 이 표현을 하면 다들 이해를 잘 못하던데, 내 경우에 SF 소설의 온도는 늘 차갑다. 책에 온도라니? 차갑다니?

그러게. 나도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마땅한 말을 아직 찾지 못했는데, 나와 비슷한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져 더 보편적인 표현을 찾았으면 좋겠다. 민초파와 반민초파처럼 극명하게 갈리는, 부먹과 찍먹처럼 하나의 밈같은 SF호불호를 표현할 수 있는 적당한 표현 말이다.


오늘 길을 걷다 디지털 약자를 위한 버스 광고 캠페인을 우연히 봤다. 꽤 오래되었을 텐데 이제서야 내 눈에 띄었던 것은 그동안 무관심 하다 최근에서야 그쪽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일 테지. 디지털 약자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니 우리 삶에 너무나 밀접하고 익숙해진 키오스크의 이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인 단말기인 키오스크가 보편화되면서 여러모로 편리한 면이 많다고만 생각했는데, 노년층과 디지털 취약계층(장애인, 외국인 등)은 키오스크의 사용이 어려워 심리적 장벽과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서울시에서는 디지털 약자를 대상으로 한 키오스크 이용 교육 및 홍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는데, 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무언가가 누군가에게는 소통의 장벽이 되어버렸다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의 젊음은 언제까지일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도태되는 시기가 머지않아 나에게도 찾아올 것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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