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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n 03. 2023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내가 맞을까?

'화장법'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미용이라는 의미의 장을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보편적 질서, 즉 코스모스를 환기함과 동시에 그 다의적 차원에서 일종의 '가면' 즉 위장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적'은 누구일까?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난주 독서모임에서는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이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읽을 당시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뚝딱 해치웠다(?)는 지인의 소개에 호기심이 생겨 바로 책 목록에 적어뒀었다. 다 읽고 난 뒤에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고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독서모임원들과도 이 책을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에 날짜를 여유롭게 잡아 모임을 기획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드디어 그 모임을 진행한 것이다.


온통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이 책은 사실 읽는 내내 많이 불편했다. 주인공 제롬 앙귀스트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말을 늘어놓는 텍스토스 텍셀의 집적거리는 모습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각을 공격하는 말로 상대를 쉴 새 없이 몰아붙인다.


그렇죠. 당신에겐 그가 적이죠. 아마도 적은 당신의 외부에 따로 존재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 적이 지금 당신 곁에 앉아 있다고 여기겠지만, 아마도 그는 당신의 독서를 방해하면서 당신의 내면에, 머리와 뱃속에 이미 들어가 있을 겁니다.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스 텍셀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순간 이야기는 끝이 난다.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거의 낙천적이게 들릴 정도로 섬뜩한 지옥을 보여준다는 출판사의 평에서 또 다른 삶의 깨달음을 얻는다. 아멜리 노통브에게 있어 지옥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다고 말하는 문장에 한동안 멍해진다.


메타인지, 자기 객관화, 인지부조화, 확증편향 등 자기 스스로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주어질 때면 나는 꽤 당당했던 것 같다. 누구보다 나를 잘 살피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이 있었나 보다. '나만큼 나를 돌아보고, 검열하고, 반추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어'라는 다소 오만한 생각을 때때로, 아니 꽤 자주 품었나 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로는 그만큼 위험한 확신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그동안 나는 과연 나를 제대로 알아왔던 것이 맞기는 한 걸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다시 나를 검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롬 앙귀스트는 자신의 떳떳함과 고결함에 자신 있었던 인물이다. 설마 내가 그랬을 리 없다고 단언했다. 아내를 죽인 범인이 실은 자기 자신이었다니, 또 다른 인격을 가진 텍스토스 텍셀이었다니! 두 인물이 실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안 뒤로 인간의 이중적인 면에 대해서도 생각이 깊어졌다. 작년에 봤던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모습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약을 실험하다 선과 악으로 철저히 분리된 지킬과 하이드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다 자신할 수 있을까. 선명하지 않을 뿐 누구에게나 자신도 몰랐던 혹은 알아도 모른체하고 싶었던 자신만의 내면이 있을 테니까.


궁금하다.

이제는 정말 궁금해진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껏 알아왔던 나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맞기는 한 걸까.

타인에게 보여지는 나의 모습과 내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모습과 일치하긴 하는 걸까.


김겨울 작가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에서 누구에게나 자기혐오의 시간이 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여러분은 어느 시간에 본인이 가장 싫으세요?"라는 그녀의 질문에 머리를 갸우뚱했었는데, 글쎄... 요즘의 나는 혼란스러운 궤도에 제대로 올라탄 느낌이 든다. 앞으로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가야 할까.


요즘 일본 작가인 '미나토 가나에'의 <모성>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엄마가 기억하는 딸의 모습과 딸이 기억하는 엄마의 모습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책을 읽으며 정말 궁금해졌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혹시 왜곡되어 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독하게 다짐하던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가 됐다.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라는 상담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감정이 가득 담긴 삶은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라고 말이다. 닮고 싶지 않은 면을 나도 모르게 닮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그 순간의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어떨까. 엄마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미워하고 싶었지만 그럼에도 미워하지 않고, 엄마를 이해하는 마음이면 어떨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다.


이 세상에 자기 객관화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내가 맞을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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