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츠비에게 데이지는 무엇이었을까
지난 주말 신형철 평론가의 고전수업을 듣고 왔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을 통해 신형철 평론가의 깊이 있는 사유와 통찰력, 타인을 살피는 섬세한 마음 등을 느껴왔던 터라 그가 말하는 '개츠비는 위대한가,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가?'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책과 영화를 통해 접했던 개츠비의 사랑이 그렇게 위대해 보이지는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
수업은 약 2시간가량 진행됐는데, 시작은 '개츠비'였으나 결국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알고 있는 그의 책은 '위대한 개츠비'와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뿐이었지만, 그날의 강연에서 인상 깊게 들어왔던 책은 '무너져 내리다(The Crack-Up)'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를 표제작으로 총 6편의 단편소설을 하나로 묶은 작품집인데 그리 유명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맨 앞에 실려있는 표제작 '무너져 내리다'는 그가 실제로 겪었던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한다. 꿈에 그리던 여인과의 결혼에 성공했고, 남부러울 것 없는 명성도 얻었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던 것이다. 잘 몰랐는데 그는 '위대한 개츠비'로 잘 알려진 작가였지만 그 외에도 다수의 작품들을 집필했었다. 하지만 발표한 작품들마다 연이어 실패를 거듭했고, 급기야는 그의 결혼생활마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서서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강연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울도서관에서 그 책을 대출하려고 했는데, 보존서고에 잠들어(?) 있다는 사서분의 답변에 '확실히 인기가 없는 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그래도 신청은 해두었다).
신형철 평론가는 그날의 수업에서 '상실과 추구'에 대한 내용을 깊이 있게 설명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상실과 추구는 같은 선상이라는 것이다. 추구 속에 상실이 있고 상실이 이미 추구라는 것. 풀어서 말해보자면 내가 간절히 소망했던 추구의 형체가 실은 그렇게까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는, 즉 내가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었다는 걸 명징하게 깨닫는 순간이 바로 상실이 되는 것이다. 이건 환상과 환멸의 과정과도 맞닿아 있다. 흔히 상실이라 함은 굉장히 거창한 것들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그가 말하는 상실은 그렇지 않다는 점이 더 인상 깊었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상실되는 것이 생기곤 하니까. 우리는 이럴 때를 흔히 '덧없다'라고 표현한다. 내가 가치 있게 생각했던 무언가가 실은 나의 환상이 만들어낸 무언가라는 것을 강렬하게 깨닫는 그 순간이 곧 상실이고, 그 환상에서 빠져나오는 과정을 통해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건 '시간에 의한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종종 회자되곤 하는 오래된 커플의 이별사례도 이와 비슷할 때가 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평범하게 시작된 어떤 하루, 익숙한 연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들 사이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평소처럼 흘러가던 수많은 하루 중 일부일 뿐인데,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 이 사랑이 끝났구나, 나 이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구나, 헤어져야겠구나'라는 강렬한 메시지. 둔탁한 무언가로 아무런 신호도 없이 기습당하듯 얻어맞는 느낌말이다. 이 상황의 가장 큰 문제는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일이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돼버린 거다. 시간에 의한 상실. 그렇다면 우리는 반복되는 이 삶 속에서 사랑을 추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앞서 말한 결론에 의하면 나는 아무것도, 어떤 것도 사랑하고 싶지가 않아 진다. 그게 사람이 되었든, 물건이 되었든, 현상이 되었든, 상황이 되었든 그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이건 조금 바꿔 말하자면 아무것도 기대하고 싶지 않아 진다는 말과도 같다.
신형철 평론가는 뒤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시간은 가차 없이 흐르고 삶의 의미는 드물게만 찾아지는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실은 많은 시간을 인생 그 자체와 싸우며 보낸다는 것이다. 별것 없는 일상의 반복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상실의 경험을 통해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한층 더 성숙해지기도 한다. 환상을 대입했던 무언가에서 시선을 돌려 그 에너지를 또 다른 곳에 쏟기도 하면서. 물론 충분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기는 해야겠지만 말이다.
삶의 의미라는 거창한 주제를 끌어올 때마다 인생에 모든 답이 정해져 있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차오를 때가 있다. 현재의 순간이 영원하며 똑같은 현재가 영원히 반복된다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처럼 말이다. 어차피 현재가 무한히 반복되도록 다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지금 나의 선택이 다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일까. 참으로 덧없다. 덧없어... 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아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 현재, 미래의 경계는 큰 의미가 없고, 똑같은 현재가 반복되는 형식이라 할지라도 오늘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내가 아닐까 싶어서다. 같은 상황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지는 것처럼, 오늘의 하루에 어떤 가치를 담느냐 정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인생은 어차피 허무한데, 그 허무함을 어떻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혹은 풍성하게 채워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 될 테니 말이다.
강의 말미에 신형철 평론가는 '희망을 갖는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시간의 연속과 삶의 덧없음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사람들, 그건 하나의 재능이라고 말이다. 이게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인식의 전환일 테고, 그가 말하는 변증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보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 모두가 아는 진리를 그 진리로 인정은 하되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해 삶을 아름답고 밀도 있게 가꿔가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최근 여러 상실을 경험했다. 예상했던 것도 있었고, 내가 만든 것도 있었고, 예상치 못한 부분도 있었다. 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진 느낌에 한동안 멍하기도 했고, 다시 회복하는데 얼마의 시간이 걸릴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에 적응해 나가는 내 스스로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의 맷집이 그만큼 단단해진 것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 사실 뭐 정확히 따지고들 필요도 없겠지만서도.
인연을 정리하면서 느꼈던 것 중 한 가지는 이제 어디에도 정착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하기에 매주 나갔던 독서모임도 마찬가지다. 나는 주말이 되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누군가와 책을 매개로 한 깊은 사유의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이제는 그곳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않고 유목민이 되어 떠돌기로 마음먹었다. 관심 있는 모임은 이전부터 차곡차곡 기록해 뒀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매주 낯선 사람들을 낯선 공간에서 마주하는 생경한 경험이 썩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조금 편안하기도 했다. 소속감이 들지 않아 불안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우려와 달리 나는 더 자유로워졌고, 더욱 나다워졌다. 당분간은 나만 돌보는 시간을 갖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것과 경험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가 점점 늘어간다(그리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보다 나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싶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