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싫지가 않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 이 문장만큼은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접해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꽤나 유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데미안을 처음으로 제대로(?) 읽은 것은 20대 후반 언저리쯤이었다. 아마 학창 시절에도 필독서로 읽었을 테지만 그때의 내가 이 책의 내용을 과연 이해하기는 했을까 의문스럽다. 딱히 떠오르는 내용이 없는 걸 보니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의 과정 중 하나로 여겼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20대 후반이 되어 데미안을 읽으면서는 위에서 언급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고, 한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는 19살에 처음 만난 친구였는데 분명 동갑이었음에도 또래 친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다. 어릴 때부터 다독가였고 꾸준히 무언가를 써왔던 그 아이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일반적이지 않고 남달랐다. 대화를 나누면서도 생각의 깊이에서 격차가 느껴져 따라가기 버거울 때가 많았고, 내 일상의 커다란 고민들도 그 아이에게만 가면 그저 시시한 일들에 불과할 정도로 모든 게 명료한 답으로 돌아오곤 했다. 당시의 나는 가치관이 제대로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아니 잘할 수 있는 게 대체 있기나 한 건지 모든 게 혼란스럽기만 한 20살이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정말 많이 따랐다. 자주 언니 같았고 가끔은 친구 같았다. 그 아이는 늘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면서 내가 그 아이를 동경하게끔 만들었다. 삶의 여러 면에 있어 배울 점이 정말 많은 친구라고 생각하며 20살의 나에게 그 아이의 존재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맹목적으로 따르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
그럼 다시 데미안으로 돌아가 볼까. 데미안의 주인공은 '싱클레어'다. 책의 전반적인 줄거리는 싱클레어를 중심으로 흘러가고, 싱클레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미안은 어릴 적 내가 그 친구를 바라보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었다. 그래서 데미안을 처음 읽었을 당시 그 친구가 계속 떠올랐지만, 그때는 더 이상 연락을 이어가고 있지 않았기에 아련한 추억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친구는 나를 보면 국화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국화야"라고 가만히 부를 때가 더 많았다. 그 덕에 지금의 나는 여전히 꽃 중에서도 국화를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약 5년이 흐른 지금, 데미안을 재독하며 놀랐던 점 중 하나는 그때 읽었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인상 깊게 다가오는 문장도 달랐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찾아내야 해.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금지되어 있는지를 자기에게 금지된 것은 무엇인지를 말이야. 사람은 금지된 일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도 아주 나쁜 인간일 수 있어. 정반대일 수도 있고. 실제로 그건 그저 편안함의 문제란 얘기야! 너무 안일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주체적 판단을 하기 힘든 사람은 기존의 금지들에 그대로 순응해 버리지. 그게 쉬우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서 금지를 느껴. 그들에게는 다른 명예로운 사람이 일상으로 하는 일들이 금지되고, 보통은 금지되는 다른 일들이 허락돼. 그건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해.
당시에 읽었던 데미안이 맹목적인 동경의 대상이었다면, 이번에 읽었던 데미안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재독하며 느낀 데미안의 모습은 마치 악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쁜 의미의 악마라기보다는 반항아의 느낌 정도?
하지만 이 악은 단순한 (살인과 폭력 같은 극악무도한)악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누구에게나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자신만의 악한 본질이 존재할 것이다. 그 악함을 다스리려면 우선 자신의 그림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걸 폭력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마주할 현명함 또한 필요할 것이다. 나에게 악함이란 있을 수 없다고 자신하며 외면하기만 하다가는 억눌린 자신의 그림자가 어느 예상치 못한 순간, 가장 미숙한 방법으로 표출될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어떤 나가 선이고, 어떤 나가 악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악을 알았다면 일방적으로 억압만 할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표출하는 방법을 알아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다시 읽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악한 면 중 하나라는 것이다. 데미안은 꽤나 반항아였다. 근데 반항이 꼭 나쁜 것일까? 맹목적인 순응만이 옳은 것일까?
나의 악함을 풀고자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안하무인처럼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악한 면을 직면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강명 작가도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논쟁적이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옳고 그름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파고드는 순간들이 있다. 선과 악의 구분 또한 마찬가지다. 이분법적인 논리가 때로는 얼마나 편협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지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익히 배워왔음에도 나는 자꾸 정답만을 파헤친다. 모 아니면 도라고,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 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그 안에 숨어있는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따져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때아닌 나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깊은 내면 감추고 싶은 고질적인 모습들을 말이다.
요즘 나의 키워드는 '불편함'이다. 예민한 기질상 남들은 느끼지 못하는 여러 불편함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삶의 풍파를 겪는 건 익숙하지만, 그럼에도 도드라지게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관계라던가, 관계? 그리고 관계(그만해) 말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불편하지 않은 선택들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감정을 억누르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거나 일부러 감정을 끌어올리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 안전한 선택지보다는 편안한 선택지를 고르고, 내 감정이 가장 자유로운 상태일 수 있도록 계속해서 나를 다독이며 불편하지 않은 선택들을 이어가고 있다.
아니 근데 한참을 쓰고 보니 이 글의 시작은 분명 데미안이었는데, 결론은 대체 뭔지를 모르겠다. 여하튼 데미안은 나에게 여전히 어려운 책이고 이번에 재독을 하면서 느낀 감상을 쓰면서도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건지, 아니 제대로 이해한다는 게 대체 뭔지 여전히 모호하다. 10년 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