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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18. 2023

당신의 19호실은 어디인가요?

창원에서 만난 선물

"사장님, 오늘 혹시 휴무인가요?"


독립서점이나 동네책방은 정기적으로 문을 여는 곳도 있지만, 그날의 사정에 따라 혹은 사장님의 일정에 따라 문을 여닫는 일이 잦은 곳도 더러 있었다. 이번에 찾은 서점도 요일별로 문을 여닫는 시간이 달랐다. 일월은 정기휴무, 화목은 오후 6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 수금은 오후 12시부터 6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5시까지였다. 그중 내가 이곳을 방문한 날은 수요일이었다. 창원 여행을 다녀오면서 둘째 날,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들르고 싶은 서점이었다. 책방 이름은 <책방19호실>. 뭔가 이렇다 할 소개글이 없어 더 궁금해졌고, 시청에서 거리가 꽤 있었음에도 굳이 버스를 타고 오픈 시간에 맞춰 찾아갔다. 골목 구석에 자리한 서점 앞에 도착했는데, 웬걸. 불이 꺼져있었다. 겉에서 보니 분명 책방은 맞고, 12시가 조금 지났는데도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서울이었다면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다 하고 돌아섰을 텐데, 창원 여행은 모든 시간들이 다 귀했다. 이곳까지 부러 발걸음 한 것을 허탕치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 책방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가더니 젊은 여자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늘은 오픈 시간이 12시인 걸로 알고 왔는데, 혹시 문을 열지 않는 것이냐는 나의 물음에 사장님은 급하게 납품할 것이 있어 잠시 근처에 나와있다며 10분 안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죄송하다는 말을 연신 덧붙이시며 말이다. 나는 괜찮다고, 천천히 오시라고, 이 근처에 있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웬 여성분이 차를 주차하고 다급하게 책방 문을 여시는 걸 보고, 숨 돌릴 틈을 드려야 할 것 같아 멀리서 가만히 기다렸다가 천천히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장님은 숨을 몰아쉬시며 환한 얼굴로 다시 한번 반가움과 미안함을 담은 사과를 건네셨다. 나 또한 연신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천천히 책방을 둘러봤다. 처음 들어섰을 때만 해도 '나 때문에 괜히 다급하게 오시게 한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올라왔고, 이렇게까지 했는데 마음에 드는 책이 없어 빈손으로 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올라왔다. '아냐, 나는 그냥 이곳에 책을 보러 온 손님일 뿐이야'라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곤 다시 책방에 집중하기로 했다.


확실히 서울의 독립서점보다 지방의 독립서점들은 기본적으로 규모가 조금 큰 편이다.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이었음에도 디귿자형으로 책장을 두고, 그 가운데 테이블과 의자를 두셔서 그런지 공간이 훨씬 넓어 보였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올라가는 곳(이런 곳은 또 처음이다)이라는 점도 신기했다. 책들을 천천히 살피면서 사장님의 안목에도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 한 권, 한 권에 정성스러운 손글씨로 서평을 남겨 놓으셨는데, 그 서평이 진부하지 않고, 읽으면서 좋았던 부분을 솔직하게 잘 담아내고 있었다. 책갈피처럼 끼워둔 것도 있었고, 종이에 실을 달아 책 사이에 끼워둔 것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 공간의 책들을 가만히 둘러보기만 했는데, 어느새 사장님이 적어놓으신 글귀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이분의 정성스러움은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게 됐다. 사장님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오프라인 독서모임도 운영하고 계셨고, 그것의 번외 편인지 "뮤트북클럽"이라는 신기한 독서모임도 있었다. 일명 책 편지라고 불리는 이 모임은 사장님만의 센스가 돋보이는 모임이었다.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책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알 수 없는 나만의 믿음이 있다. 내가 이곳저곳 다양한 독립서점, 동네책방을 돌아다니면서도 가장 중점적으로 봤던 건 그 가게만의 고유함이었다. 베스트셀러나 누구나 알 법한 책들로 도배된 책장, 감성 사진을 잔뜩 얻어 갈 수 있을 것 같은 예쁜 인테리어, 아기자기한 굿즈로 가득 채워진 서점들은 이제 질렸고, 내가 찾는 건 그 공간만이 갖고 있는 유일무이함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책을 고르는 사장님만의 고유한 감각과 안목이 있는가, 이 책을 입고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만의 스토리가 담겨 있는가 등이다. 그런 분이 고심해서 고른 책이라면 그 책만큼은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곤 했으니까. <책방19호실>은 그런 면에서 나에게 감동을 준 책방이다. 그 공간에 가득 담긴 사장님의 빼곡한 글씨가 나를 매료시켰다. 왜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지, 이 책이 자신에게 어땠는지를 꼼꼼하게 담아낸 사장님의 진심이 내 마음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신간보다는 출간된 지 조금 지난 책들이 많았고, 고전도 많았다(국내와 해외를 포함해서). 사실 이 서점의 이름도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라는 책에서 영감을 받아 지으신 것 같았는데, 나 또한 그 책을 좋아한다.



이 방에서 수전이 뭘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충분히 쉬고 나면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서 양팔을 쭉 뻗고 미소를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익명의 존재가 된 이 순간이 귀중했다. 여기서 그녀는 네 아이의 어머니, 매슈의 아내, 파크스 부인과 소피 트라우브의 고용주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친구, 교사, 상인 등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고 있는 그 수전 롤링스가 아니었다. 정원이 딸린 크고 하얀 집의 안주인도 아니고, 이런저런 행사에 딱 맞게 차려입을 수 있는 다양한 옷을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는 존스 부인이고 혼자였다.

<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



그 공간을 가만히 둘러보다 내가 이번 창원 여행에서 읽으려고 챙겨갔던 파스칼 키냐르의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책도 만났다. 마침 그 전날 그 책을 다 읽었었는데, 사장님은 이 책을 읽고 어떤 감상을 느끼셨을까 궁금해 그 책 옆에 달린 글귀를 꼼꼼하게 읽었다.





이곳은 각 주제에 따라 책장의 구성을 달리하고 있었고, 한쪽 벽면은 시집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기도 했다. 적당한 조도의 조명과 잔잔한 음악 덕분에 아늑한 분위기를 한껏 더하고 있었고, 동네 자체가 조용해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잠깐 들렀다 가려던 그 책방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며 사장님의 정성이 곳곳에서 묻어나는 책들의 향기를 듬뿍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을 골랐다. 한정원 작가의 <시와 산책>,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클럽>이라는 책이었다. 도서관 애용자인 내가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대출해 읽을 수 있는 책들이었지만, 이 공간에서 만난 사장님의 안목을 믿고 구매한 책이라는 의미가 이 책과의 만남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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