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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02. 2023

시계가 없는 집

할아버지 집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기 때문에 연예 관련이나 엔터테인먼트 관련 정보는 전혀 몰랐고, 심지어 일어날 때 사용하는 자명종도 없었다.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항상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중략)
할아버지는 매일 산책을 하고, 낚시를 하고, 책을 읽고, 풍경을 만들고,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받은 음식 재료를 아주 맛있게 조리하고, 그 음식을 조용히 맛보는 생활을 계속해왔다.
할아버지는 내가 지금까지 안고 있던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았다.
그것도 아주 만족스럽게.

<에밀리의 작은 부엌칼> 모리사와 아키오



처음 이 집에 이사 왔을 때 다짐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꼭 필요한 물건만 사들이자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그 집안을 채우고 있는, 흔히 필수품이라 여겨지는 물건들이 많았다. 만약 내가 혼자 살게 된다면 가장 먼저 치우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이른 아침 뉴스를 시작으로 늦은 밤까지도 텔레비전은 늘 꺼지지 않았다. 필요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음에도 습관적으로 틀어두는 게 싫었다. 나에게는 소음과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래서 이곳으로 혼자 이사 왔을 때,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고 관리비 항목에서도 TV 수신료를 체크하지 않았다. 덕분에 5,000원을 아낄 수 있었고, 지긋지긋한 소음에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요즘은 OTT 서비스가 너무나 잘 되어있고, 가족 계정으로  넷플릭스를 구독하고 있지만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시간을 정해두고 보는 편이다. 드라마 한 편을 다 보는데도 며칠이 걸린다. 한 편을 온전히 보는 것이 아니라, 식사시간에만 잠깐 보고 꺼버리기 때문이다. 그것 말고도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이 많으니까. 이를테면 읽고 쓰는 것 말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읽고 쓰기에 매우 쾌적한 상태를 유지 중이다. 불필요한 물건은 들이지 않았고 소음도 만들지 않는다. 집에서는 주로 잔잔한 뉴에이지나 빗소리 등을 백색소음으로 켜둔다. 이걸 켜두는 이유도 다름 아닌 층간소음 때문이다. 아무 소리도 켜지 않으면 이웃집에서 내는 생활 소음이 꽤나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건물 구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방을 무음에 가깝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방음실이 아닌 이상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되도록 귀에 자극이 가지 않는 잔잔한 BGM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리고 최근에 또 하나의 물건을 없앴다. 정확히는 없앴다기보다 없어졌다. 다름 아닌 시계다. 시계가 사라진 지는 몇 달이 지났다. 약 4년 전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 아트박스에 들러 작은 탁상시계를 하나 구입했었다. 별 탈 없이 잘 써왔던 시계가 나도 모르는 사이 안에 있던 건전지가 녹아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어 얼마 전 작별을 고했다. 방에 시계가 없다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얼른 새 시계를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는데, 웬걸. 막상 시계 없이 살아보니 시계 없이도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우선 나는 모닝콜을 맞추지 않고도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편이라 시계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출근 준비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새벽형 인간에 가까운 나는 5시 전부터 이미 하루를 시작한다. 덕분에 시계를 보며 다급하게 출근을 준비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비슷한 루틴으로 살아가는 시계 같은 사람인지라, 이쯤 되면 이 정도 시간이 되었을까 싶어 핸드폰 시계를 보면 얼추 예상한 시간과 일치할 때가 많았다.


덕분에 이제는 내 방에 시계가 없다는 사실이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익숙해졌다. 시간이 궁금할 때는 핸드폰 시계를 들여다보면 된다(사실 집에 오면 핸드폰도 잘 보지 않는 편이긴 한데). 가끔은 이렇게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마냥 싫지만도 않았다. 오히려 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안온한 시간이 좋을 때도 많았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에밀리의 작은 부엌칼>이라는 소설을 다 읽었다. 주인공인 에밀리는 직장에서 저지른 하나의 사건 때문에 도망치듯 외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작은 섬마을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외할아버지의 목가적인 삶을 지켜보며 도시에서의 상처를 서서히 치유해 나간다. 이 책은 하루를 느린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실된 모습을 섬세하게 담아내고 있다. 에밀리는 그곳에서 한 끼 식사에도 깊은 정성을 담는 마음을 배우며 따뜻한 관계를 맺어간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유쾌한 필체로 풀어낸 작가의 필력에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에밀리를 괴롭히는 캐릭터도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따뜻한 소설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작년에 읽었던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는 기분, 오래전에 읽었던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는 기분.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던 무언가가 사라졌을 때 가장 먼저 올라오는 마음은 조급함이다. 당장 사서 그것을 채워야만 할 것 같은 불안함이 올라온다. 시계도 그랬다. 시간의 소중함을 늘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였기에 시계가 없는 삶이란 있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중요한 건 잠깐의 시간도 밀도 있게 쓰고자 하는 정성스러운 마음이었다. 이 소설에서도 느린 시간을 향유하며 삶을 관조하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쫓기듯 살아가고 싶지 않은 나의 욕구가 제대로 발현된 느낌마저 들었다. 앞으로도 나는 이 공간에 시계를 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삶을 관망하듯 한발 물러나 여유로운 삶의 태도를 취하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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