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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23. 2023

작고 시시한 것들의 아름다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세이렌은 바다 한가운데 솟아있는 작은 섬이나 암초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시인들은 세이렌들이 지중해에 있는 사이레눔 스코풀리라는 작은 바위섬에 산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점차 후대에 와서는 꽃으로 뒤덮인 안테모사라는 섬에 사는 것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이들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근처를 지나는 배의 선원들을 유혹해 자신의 섬으로 끌어들인 후 암초나 얕은 물로 유인해 배를 난파시켜 선원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세이렌의 모습은 의외의 익숙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스타벅스의 로고 속 인어의 모습이다. 스타벅스 창업주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의 심볼 마크로 세이렌을 선택한 것은 ‘세이렌이 뱃사람을 홀린 것처럼, 사람들을 홀려 커피를 마시게 하겠다’라는 의미 때문이라고 한다.


서론이 길었는데, 세이렌 신화를 모티브로 한 창작 뮤지컬 <안테모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뮤지컬 <안테모사>는 세이렌 신화에 등장하는 꽃으로 뒤덮인 낙원의 섬 '안테모사'를 배경으로 한다. 다만 뮤지컬 속 안테모사는 전설 속 낙원의 섬처럼 꽃으로 뒤덮인 곳이 아닌, 넝쿨과 고물들로 뒤덮인 작은 오두막집의 모습이라는 차이가 있다.



어느 작고 평범한 마을에서 이어지는 울창한 자작나무 숲속. 나무와 넝쿨, 고물로 뒤덮인 집, 안테모사.

사냥을 하고 약초를 캐는 할머니 페이시노에,
고물을 줍는 할머니 텔레스, 그리고 낡은 고물을 고치며 살림을 책임지는 알비노(백색증) 소녀 몰페까지.
백발의 세 여인이 그들만의 낙원을 가꾸며 행복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 날, 여비를 벌기 위해 우체부 일을 시작한 떠돌이 소년 제논이 새로 부임한 시장의 공문을 배정받고 안테모사로 향하게 된다.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안테모사를 방문한 낯선 손님 제논과 그가 가져온 공문으로 인해 여인들의 삶에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지난 주말, 국립정동극장 세실에서 공연 중인 창작ing의 여덟 번째 작품, 뮤지컬 <안테모사>를 보고 왔다.

한 달 전쯤이던가 대학로에 갔다가 우연히 이 뮤지컬의 포스터를 보게 됐다.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규정짓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와 '겉보기에 하찮고 시시하게 느껴지는 존재들의 아름다운 가치'라는 소개 글에 관심이 생겼다. 작고 사소한 것에 진심을 다하는 나의 감수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문장에 <안테모사>를 검색했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정동극장 세실에서 열린다는 정보를 얻었다. 덕분에 티켓팅 오픈런이라는 걸 처음 해봤는데, 좋은 자리는 어찌나 빨리 차던지 잊고 있던 수강신청의 악몽이 떠오르는 원치 않는 경험까지 했다. 광클의 경지에 감탄하는 것도 잠시, 뒷줄이긴 했지만 다행히 중앙 좌석 예매에 성공했고 극장 자체에 단차가 있다는 말에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자 백색증을 갖고 있는 어린 소녀 몰페는 고립된 안테모사에서 할머니들과 함께 살 때는 자신의 모습이 전혀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다. 그러다 처음으로 안테모사를 떠나 사람들이 모여있는 마을에 갔다가 자신의 외모가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받고 돌아온다. 하지만 상처받은 몰페에게 제논이 말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건 아니라며"


이 말은 떠돌이 인생이라고 자신을 비관하던 제논에게 몰페가 했던 말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나를 규정하지 않고, 스스로를 정의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들과 제논의 목소리에 다시 힘을 얻은 몰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하기 시작한다. 말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그녀의 삶에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안테모사에서 몰페는 텔레스 할머니가 주워온 고물을 고치며 살림을 꾸려가는 소녀다. 찌그러진 냄비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겨있다며 소중히 닦고 새생명을 불어넣는다. 낡고 해어진 것도 각자만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하는 몰페의 작은 목소리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이 작품의 무대 역시 이 메시지의 내용을 담아 '리사이클링'으로 구현됐다고 한다. 새롭게 제작하고 폐기하는 일반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버려진 물건들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무대를 꾸미는 것이 핵심 컨셉이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이 우리 삶의 소박한 일상을 풀어내고 있어 좋았다. 악역이 등장하지 않아 따뜻했고, 작고 보잘것없다 여겨지는 물건들을 소중히 여기는 정성스러움에 마음이 녹았다. 쓸모를 다한 물건에 생명력을 불어 넣고,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은 채 자신들만의 낙원을 가꿔가는 그들의 맑은 모습을 통해 지금의 나를 다시 바라본다. 다른 건 그저 다른 것일 뿐이다. 스스로의 고유함을 알아보는 이가 다름 아닌 나부터이길 바라며, 앞으로도 계속 나만의 스토리를 이어가 보자고 가만히 읊조려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밤바람이 찼다.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고, 따뜻한 곳을 찾아 더 움츠러드는 시기가 왔음에도 계절의 향이 바뀐 것에 감사하며 달라진 공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으로 가득 차는 느낌이 오랜만이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일상을 감각하며 살아간다는 건,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 아닐까.

'남은 내 삶이 딱 요즘만 같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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