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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15. 2024

선을 넘었다

인간관계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해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상대의 반응을 통해 내 존재 가치를 가늠해보는 일이다. 상대가 나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냈다고 해서 내 존재 가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건 아니다. 이 두 가지는 엄연히 별개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물론 인간은 타인과 상호작용하며 자아의식을 쌓아가는 사회적 존재가 맞다. 그러나 상대의 부정적인 반응에 내 존재 가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릴 필요는 없다. 그건 도리어 내가 나 자신을 상처 입히는 일이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해치는 결과를 불러올 뿐이다.
인간의 사고에 있어 상상력은 필수 요소다. 다른 이의 입장에 공감하고 서로 소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상상력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가끔 지나친 상상력은 독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단순함이 명쾌한 약이 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태지원



사소한 균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최근 내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들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동성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 중 하나였는데, 누군가의 토라짐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의미도 없고 기운만 빠지는 이 기싸움도 같이 졸업할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 특히 같은 성별이 모이는 자리에서 이런 기싸움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는 이들을 여럿 만났다. 덕분에 나는 사회성을 키우면서도 이쪽 눈치는 일부러 없는 척했다. 주변에서 눈치가 없다거나 눈치를 안 보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어왔는데, 정확히는 이렇다. 눈치를 보지만 보지 않는 척하는 것. 이 포지션이 굉장히 편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는 대체로 타인의 시선에 일일이 연연하지 않는 사람처럼 비춰지곤 했으니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무례하게 행동한다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의 선이 명확해 시시한 감정낭비에 일일이 마음 쏟지 않는 사람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주 들었던 말 중 하나가 "너 그런 거 신경 안 쓰잖아."였다.


이건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과는 확실히 다른 결인데, 이를테면 나는 본인의 감정만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이들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편이다. 오지랖이 넓은 이들을 보고 붙임성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던데, 나는 그 말에도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건 일방적이고 무례한 것이지 붙임성이 좋다는 말로 두루뭉술하게 포장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친분이 있든 없든 타인에게 다가서기 전에 약간의 머뭇거림이 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이런 섬세한 사람들을 보고 낯가림이 심하다거나 숫기가 없어 그런 거라고 납작하게 해석하는 이들을 만날 때면 속상한 마음이 올라오는데, 그게 아니라고. 그건 타인에 대한 조심성이다. 배려와 존중이 담긴 다가감이다. 상대가 나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줄 거라는 오만함을 내려놓고, 상대의 반응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성숙하고 사려 깊은 자질이다.


그래서 나는 그와 반대의 사람들을 만났을 때 꽤나 독해지는 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알게 모르게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아직 친해질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너 나 알아?) 브레이크도 없이 신나게 달려와놓고는, 무심한 내 반응에 토라져 뒤돌아 나를 욕하는 사람들. 아니, 도대체 이 무례함과 오만함은 어떤 자신감이면 가능한 것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바란 적도 없는데 자꾸 나를 자신들의 무리에 끼워주겠다나 뭐라나(귀찮다고 쫌). 그럼 나는 정중하게 거절을 한다. 하지만 그때부터 묘한 기류가 시작된다.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닌데, 이들의 눈치를 봐가며 기분을 맞추는 일이 내게는 너무나 소모적이었다. 흔히 밈처럼 돌곤 하는 말이 여자친구의 서운함을 풀어주는 남자친구의 모습이던데, 내 경우 동성의 친구들과 있으면 나에게 그런 기대감을 품는 친구들이 많았다. 시시콜콜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 묵직한 성격 탓인지 수다쟁이 동성친구들의 대화 상대(라고 쓰고 감정쓰레기통이라고 읽는)가 되어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정말 난감했다.


그래서 때로는 여자인 친구들보다 남자인 친구들이 편할 때도 많았다. 적어도 그들은 나에게 삐지지는 않았으니까. 뭐 또 모르지. 실제로는 삐지고 싶었어도 스스로가 유치하다 여겨졌는지(여자한테 이러는 게 맞나), 굳이 티를 낸 적은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동성친구들은 달랐다. 내가 무슨 본인들 남자친구도 아니고, 왜 나에게 삐지고 토라지고 연락하지 않았다고 서운함을 토로하는지. 본인은 이만큼이나 해줬는데(저는 바란 적이 없다고요), 왜 같은 강도의 챙김을 돌려주지 않는다고 따지는 건지. 가만히 듣고 있자면 내가 지금 얘랑 연애를 하는 건지 우정을 나누는 건지 혼란스러워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좀 괜찮았을까. 숨 막히게 몰아붙이는 그들의 여성향 짙은 행동에 치를 떨다 손을 놔버리면, 몇 년 만에 번호를 바꾸고 다시금 연락을 취하며 놔주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숨이 턱턱 막혔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들의 감정쓰레기통도 놀잇감도 되어주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근데 이런 복잡 미묘하고도 쓸데없는 감정소모가 말이다. 나는 친구 관계에서만 해당하는 것이라 여겼다. 어리석었다. 이건 사회생활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됐다. 흔히 말하는 오지랖이 넓은 사람들이 이 부류에 속했다. 자신은 선의라 생각하고 베푸는(바란 적도 없는데 강제로 내 손에 쥐여주는) 행위에 이렇다 할 반응을 바란다는 것이다. 여기서 만약 내가 거절을 하거나 부담스러워 약간 멈칫하기라도 하면 그때부터 이 지옥의 게임이 시작된다.


유치하지만 가장 먼저는 나의 인사를 받지 않기 시작한다.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 누가 봐도 티가 날 정도로 (나만)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누가 봐도 티가 나지 않게끔 뒤에서 나를 괴롭힌다. 뒷담화의 대상에 아무렇지 않게 나를 올리고(마치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그 소문이 돌고 돌아 당사자인 내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영문을 모르던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어 보일 뿐. 아니다. 이제는 안다. 그래서 그냥 그 사람이겠거니 쓰게 웃는다. 대체로 말이 없고 혼자 다니는 사람들은 무리에서 표적이 되기 쉬우니까. 어릴 때는 이런 상황이 생기면 크게 동요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에게 더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야말로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애도 아니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생각으로 내 딴에는 이 상황을 부드럽게 풀어가고자 했던 마음이었는데, 오히려 나의 그런 모습이 그들의 비뚤어진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들의 유치한 행동에도 한결같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저자세로 나오는 나의 태도가 그들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 보란 듯이, 더 굽히라는 듯이 뻔뻔하게 행동하는 이들을 수차례 겪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마치 나를 벌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굴었다.


그때 알았다. 나를 너무 순진한 사람으로 보고 있구나. 그래서 이제는 그런 눈치게임에 굳이 나를 갈아 넣지 않는다. 그들은 본인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내가 어떡해서든 자신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쓸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하, 정말 쓴웃음이 난다. 사람이 말이야. 정도껏 해야지. 그때부터 이전의 나는 사라진다. 그들이 지금껏 알아왔던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안. 사람 잘못 봤다. 이 눈치게임에 나를 강제로 넣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릴 때는 뭣도 모르고 내가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면 상대도 충분히 그럴 거라는 환상(이자 망상)을 품었었는데, 그건 정말이지 동화 같은 이야기의 일부였다. 현실은 냉혹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낭만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똑같이 행동해 줬다. 여기서 말하는 똑같음이 똑같이 괴롭힌다는 의미가 아니라, 똑같이 무시해 줬다. 그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했다. 번번이 건네는 인사에도 나를 못 본채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고 웃으며 인사를 건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사람인데, 기분 나쁘지. 나라고 뭐 기분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심지어 여기서 내가 잘못한 거라고는 본인들의 오지랖을 거절했을 뿐이데, 이게 잘못인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감정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내 스스로를 타인들이 함부로 대하도록 방치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무례를 모르고 더 뻔뻔하게 구는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연기를 한다는 심정으로 반응했다. 철저하게 무시하기. 흔들리지 않기. 똑같은 사람처럼 굴고 싶지 않았는데, 글쎄. 또라이를 상대하려면 나도 또라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건, 사회생활을 10년 가까이하면서 온몸으로 익힌 감각 중 하나였다. 최근에 장강명 작가님과도 이와 비슷한 류의 대화를 나눴는데, 빡침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취하는 태도 같은 것에 대해서 말이다. 사람이 정도라는 게 있다. 근데 그걸 넘으면, 나도 과해진다. 부러 안 하던 행동을 하고 싶어 진다. 과할 일에는 과해질 필요가 있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선이었다. 선명한 선. 그 선명한 선을 누가 넘었다. 그래서 연기를 시작했다. 상대가 나를 함부로 대하게 나를 그 상황에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졌다. 친분을 과시하며 관계라는 권력을 휘두르도록 놔두고 싶지 않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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