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Jun 26. 2024

사라지지 마, 문학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오랜만에 중구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인문학 강좌를 듣고 왔다. 주제가 'I AM' 즉, 나(자아)에 대해 사유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제보다 더 반가웠던 건 다름 아닌 강연자의 이름이었다. 문학평론가이자 서울대 영어영문학과에 재직 중인 신형철 교수의 강연이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도 딱 이맘때쯤 그가 진행하는 고전수업을 교보문고에서 듣고 왔었는데, 어쩌다 보니 1년 만에 그의 강연을 다시 마주하게 됐다.


강연은 대강당에서 진행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빈자리 하나 없이 빼곡하게 객석을 채우고 있었다. 맨 앞자리가 있었지만 부담스러워 뒷자리로 갈까 하다가 괜히 자리를 놓칠까 싶어 엉겁결에 맨 앞자리, 그것도 완전 정면에 덜컥 앉아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집중해서 듣자는 마음으로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강연 제목은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 인지적 공감과 문학의 효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문학을 사랑하는 그의 변함없는 모습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2시간이 어떻게 흘렀나 싶을 정도로 울림이 깊은 강연이었다.


문학 작품의 매출이 해가 갈수록 현저히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해서 문학의 효용을 말한다. 우리 삶에 문학이 왜 '반드시' 필요한지를 말이다. 사실 주변만 둘러봐도 그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세상살이는 점점 더 퍽퍽해져만 가고, 공감의 부재 또한 여전하다. 비슷한 처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따뜻함이 찾아오는 착잡한 현실. 슬픈 일을 겪은 사람들은 그 일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지만, 그 일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로부터) 공감받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외롭고 고립감 찾아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떤 작가가 쓴 문장을 읽고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안다'라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풀어 말하면 '이 사람은 나의 슬픔을 혹은 고통을 안다'일 테다.


흔히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마주했을 때, 슬픔에 더 공감하기 어려운 건, 슬픔의 감정이 기쁨의 감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만 봐도 그렇다.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내고 터덜터덜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향하는 퇴근길, 집에 도착한 우리가 보고 싶은 장르는 우울하고 착잡한 현실을 다뤄낸 이야기가 아니다. 유쾌하고 긍정을 담아낸 영상과 활자를 바라지 않을까. 그래서 살기가 어려워질수록 슬픔의 감정에 공감하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는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라는 책을 통해 잘 몰랐던 장애인들의 모습을 조금 더 깊이 알게 됐다고 말했다. 비장애인들은 지하철 시위를 이어가는 장애인들의 모습을 보며 너무도 쉽고 빈번하게 이 말을 던진다. "이만하면 되지 않았어?"라고. 이 말의 속뜻은 실은 이런 게 아닐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면 안 되지.' 굉장히 폭력적인 말이다. 더 좋은 방향보다는 단순히 과거를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신형철 평론가는 적어도 언론의 자유에 있어서만큼은 '이만하면'이라는 중간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문학은 이런 상처들을 조심스럽게 보듬어 안아 우리에게 천천히 보여준다. 문학적 비유를 통해서만 스며들듯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우리 삶에 문학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까.


끝으로 그는 인생에 필요한 세 가지 공부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첫 번째는 나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 두 번째는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공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세 번째 공부가 바로 '나로부터 타인을 지키기 위한 공부'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한 두 번째보다 더욱 중요한, 다음 세대를 위한 공부. 즉, 나의 무지로부터 타인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한 교과서가 있다면 바로 '문학'인 것이다. 그럼에도 문학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정량적인 지표만으로 평가받는 사회 안에서 정서적 공감이라는 말은 다소 힘이 없다. '정서는 열등하다'라는 뿌리 깊은 편견과 더불어 과거로부터 감정은 폄하의 대상이 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인지적 공감이다. 학문적인 지식을 떠나 타인의 삶이라는 것을 들여다봤을 때, 충분히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무지가 빠르고 단편적인 도덕적 판단을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가 레일리 제이미슨의 <공감연습>이라는 책에 이런 문장이 있다.


공감은 그저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답을 하게끔 질문하는 것이다. 공감하려면 당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상 인식과 감정의 영역을 완벽하게 분리하기란 어렵고, 정서적 공감은 자칫 잘못하면 내집단만을 선호하는 그릇된 방향(과잉 공감)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닐뿐더러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는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정확히 인식한 책만이 정확한 위로를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현시대에서 그 주장을 가장 잘 담아낸 책으로 장대익 작가의 <공감의 반경>이라는 책을 추천했고, 나 또한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살포시 담아두었다. 문학이 필요한 이유가 이토록 명료한데, 그걸 왜 읽느냐고(돈으로 값어치를 매기며) 말하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문학의 부재로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에 실패한 우리가 서로를 적대시하며 선을 긋고 있는 막막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자면, 어느 곳 하나 발 디디기 어려운 외줄타기를 하는 기분마저 든다.


오늘은 서울국제도서전의 개막식이 있는 날이다. 올해로 66회를 맞이한 도서전의 주제는 '후이늠(Houynhnm)'이다. ‘후이늠’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고전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이상향으로 거짓말, 불신, 전쟁이 없는 완벽한 세상을 상징한다. 5일 동안 진행되는 이번 도서전은 올해가 유독 특별(?)한데,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 열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제 믿을 건 ‘독자’와 ‘출판인’들이다. 점점 더 문학이 사라져가는 세상을 마주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신형철 교수는 말한다. 세상이 뭐라 해도 이 공부(문학)가 자신에게만큼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그래서 문학 수호자가 되어 문학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이 학문을 지속하고 있다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선을 넘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