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돌보는 사람

당신의 마음은 오늘 안녕한가요

by 내민해

작년 한 해 공감인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마음벗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그 과정 중에 '일상공감자 과정' 체험단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매일의 삶에서 감정노동하지 않으면서 나와 타인의 마음을 돌보는 방법을 알아가는 과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공감키트를 사용하며 자신의 마음 근육을 키워간다. 체험단에서 함께 인증하는 다른 분들의 감정을 읽다 보면 생각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더 오래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을 제외한 평일 3주 동안 자신의 감정을 기록하고, 나누면서 체험단 과정이 마무리되었다. 끝으로 우리는 각자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자신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들로 살아가기를 응원했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나도 나의 감정을 올바로 인지하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갈 때가 많다. 특히 나는 타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데, 그러다 보면 어떤 상황이 발생했을 때 나의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살피곤 했다. 내 잘못이 아닌 일에도 혹시나 상대방이 나의 말과 행동으로 기분 나빴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그의 상처를 먼저 공감하게 된다. 그게 내 스스로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연스럽게 그 감정에 먼저 이입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출근길에 심리학 영상을 보면서 대인관계 민감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인관계 민감도가 높은 사람은 타인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는 대신 자신의 감정을 돌보지 못한다고 한다. 감정일기를 쓸 때를 제외하고 일상에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나의 감정을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적이 있었나를 생각해 보니 늘 내 마음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살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나는 어때?"라고 물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30여 년간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며, 우리 사회 곳곳의 트라우마 현장 피해자들과 함께했던 정혜신 작가는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서 "공감에도 자기 보호가 먼저"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공감자가 되려는 사람은 동시에 자신의 상처도 공감받을 수 있어야 한다. 공감하는 일의 전제는 공감받는 일이다. 자전하며 동시에 공전하는 지구처럼 공감은 다른 사람에게 집중하는 동시에 자기도 주목받고 공감받는 행위다. 타인을 구심점으로 오롯이 집중하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아야 가능하다.
공감은 상대를 공감 '해주는' 일이 아니다. 내 상처가 공감받는 것에 예민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공감하는 일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나와 너, 양방을 공감하지 못하면 어느 일방의 공감도 불가능한 것이 공감의 오묘한 팩트다. 그래서 공감은 너도 살리고 나도 구한다. 그래서 공감은 치유의 온전한 결정체다. 이 온전함의 토대는 오로지 자기 보호에 대한 감각에서 시작되고 유지되며 자기 보호는 자기 경계에 대한 민감성에서 시작한다.


우선은 내가 살아야 남도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감정부터 우선적으로 들여다보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나는 어떤 공감을 하고 있었나를 되짚어 본다. 나는 과연 나를 존중하고 있었던 것일까. 어릴 때부터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을 살피기보다 참는 게 미덕이라는 어른들의 말씀대로 나의 감정을 누르고, 타인의 감정에 맞추는 법을 배우고 자라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명백히 나의 잘못이 아닌 일에도 나는 타인의 감정을 살핀다. 상대방이 때려서 맞은 건 난데, 맞아서 아프다고 너무 큰소리로 말해서 저 사람이 상처받았으면 어쩌나를 걱정하는 나의 모습이 참 바보 같기도 했다.


오늘도 나는 회사에서 누군가의 잘못으로 인해 해야 할 말이 있었지만, 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의 감정을 억누른 채 되려 나를 탓했다. '그냥 네가 참으면 되는 거야'라고, 그것 하나 참지 못하는 나를 바보 같다 말하면서 말이다. 화가 난 나의 감정 자체를 부정적인 감정으로 치부한 채 인정해 주지 않고, 착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다그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야 나의 감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집으로 가는 길거리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오늘 나의 감정은 흐림이다. 쓰고 나니 이제야 좀 후련해진다.


끝으로 내가 좋아하는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외침이 떠오른다.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피하는 게 너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말이야."

"날 때리는데 가만히 맞고 있는 게 날 보호하는 거야?"

"맞서다 두 대, 세 대 맞을 거, 이기지도 못할 거, 그냥 한 대 맞고 끝내면 되는 거야."

"내가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걸 엄마가 어떻게 알아?"

엄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착하게 살아라, 말 곱게 해라, 울지 마라, 말대답하지 마라, 화내지 마라, 싸우지 마라.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런 얘길 들어서 난 내가 화가 나도 슬퍼도 죄책감이 들어. 감정이 소화가 안 되니까 쓰레기 던지듯이 마음에 던져버리는 거야. 그때그때 못 치워서 마음이 쓰레기통이 됐어. 더럽고 냄새나고 치울 수도 없는 쓰레기가 가득 쌓였어. 더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야. 나도 감정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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