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과 윤리

나의 SNS 생활은 안녕한가요

by 내민해

코로나로 일과 생활, 휴식 등 모든 것들이 온라인 세상과 더 밀접하게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미 현실과 가상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과도기에 놓여있다. 약 2년 만에 사회적 거리두기가 해제되었지만, 그 전의 세상을 잊어버린 우리는 아직 이 상황들이 서툴고 낯설기도 하다. 코로나가 확산되는 그 긴 시간 동안 우리의 삶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얼굴을 마주 보고 소통하기 힘든 만큼 비대면 소통이 늘어나고, 줌을 통한 모임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SNS를 통해 완벽한 가상의 자아를 만들고, 장식하는 데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쏟고 있기도 하다.


인터넷 검색창에 SNS를 검색하면 SNS의 정의를 비롯해서 각양각색의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이제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바로 SNS다. SNS는 온라인상에서 이용자들에게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해주는 서비스라는 정의 외에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카카오톡, 블로그,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거나 소통하는 방법은 다양해졌지만, 그만큼 개인 정보 보호나 사생활 침해 등 여러 가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특히 인스타그램의 경우 좋아요라는 반응에 에너지를 쏟는 이들이 늘어가고, 부정적인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SNS 속 편집된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SNS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고 활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들과 소통하면서 얻는 순기능도 있을 것이다.


나를 예로 들자면, 나는 사실 SNS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편집된 나를 진짜 나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졌고, 다들 어떻게든 자신을 더 드러내기 위해 혈안이 된 것만 같은 자극적인 문화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 같다. '나 행복해요', '나 이렇게 멋진 사람이에요'라고 공공연하게 자랑하는 느낌이 앙꼬 없는 찐빵처럼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실 SNS의 범위를 어디까지 열어두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SNS라는 소통의 창구가 꽤 괜찮다는 입장이다. 물론 내가 이 세계로 발을 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합리화하려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결론은 나도 이제 SNS를 활용한다. 나의 경우 온라인으로 글쓰기 모임을 약 1년가량 지속하고 있는데, SNS 플랫폼을 통해 나의 생각과 관심사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인생의 또 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 좋아하는 분야를 글로 쓰고, 랜선 친구들의 피드백을 받으며 다양한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것에 최적화된 플랫폼이 SNS가 아닐까 싶다. 진입장벽도 없고, 누구나 업로드가 가능하니까.


물론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들었던 글쓰기 강의 내용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SNS의 공감과 댓글은 평생 글쓰기 할 때 받는 여름 보너스 정도로만 생각하라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우연하게 내가 잘 쓴 글이나 좋았던 아이템들이 있을 수 있고, 공감을 많이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인정 욕구에 취한 나머지 '좋아요'를 많이 받기 위해 내 진짜 모습이 아닌 글감들을 막 끌어오는 것은 글쓰기에 오히려 독이 된다는 뜻이다. 물론 그 둘 간의 간격이 조금 모호하긴 하지만 말이다.


또한, 뭐든지 과하면 독이 되듯이 가상세계의 현실은 우리를 허무하게 만들기도 한다. 넷플릭스 다큐 <소셜딜레마>에서는 SNS가 우리를 꼬시는 과정을 바탕으로 SNS의 역기능에 대해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데이터 마케팅이라는 하나의 알고리즘으로 소비자에게 딱 맞는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주지만, 알고리즘에 따라 개인 맞춤형 정보만을 취하고 접하다 보면 인간의 사고가 편협해지기 때문이다. 좋게 말하면 소비자에게 딱 맞는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주지만, 반대로 그만큼 AI가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를 분석해서 감시, 추적, 측량하고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나의 모델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의 정보를 분석하고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추세에 발맞춰 기업들은 수익 창출을 위해 소비자들의 데이터를 수집, 분석, 예측하고 이를 바탕으로 더 정확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하고 광고를 통해 자극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소비자가 혹할 수 있는 정보들 말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고 있자면 세상이 점점 편리해지는 만큼, 그 시장 속에서 소비자들이 기업에게 무분별하게 이용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도 함께 오곤 한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본주의의 가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거대 기업의 인공지능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나는 사실 아직도 데이터 마케팅, 빅데이터, AI 등에 회의적인 시선을 갖는 구시대적인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이 점점 빨라지는 만큼 개개인의 인격과 교양도 함께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케팅의 윤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편리함만을 강조하고 있을까. 넘어지는 사람들을 왜 일으켜 세워주지 않고 나만 달려가기 바쁜 것일까. 세상은 시시각각 발전하고, 쏟아지는 정보의 호수 속에서 행여나 뒤처질까 더 많이, 더 빨리를 외치는 사람들 속에 우리는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다. 가끔 뒤도 돌아보면서 내가 가는 길이,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 것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철학교사인 안광복 작가는 <나는 이 질문이 불편하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나도 더 행복해질까?
루소에 따르면, 인간 세상은 원래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배를 채울 소박한 먹거리, 베개가 되어줄 나뭇등걸, 햇볕과 비를 피할 그늘만 있어도 인류는 행복할 수 있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은 쓸데없는 욕심을 불러일으켰다. 단순히 배불리 먹고 추위를 막기 위해 입는 것을 넘어, 남보다 좋은 것을 먹고 멋진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순간, 인간 사회는 괴로움으로 가득 찬다.


세상은 기술적으로, 물질적으로 더 빨라지고, 편리해지고 있지만, 잠깐의 기다림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로 인내심과 배려는 결여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우리의 문명은 진보하고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올곧은 문명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 관건은 '성찰'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마케팅의 호수 속에 윤리가 가장 먼저 자리 잡았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담아본다.


(위에서 표현한 진보라는 단어는 정치적 견해와는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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