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월드컵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뜨고 열기에 가득 차 있던 그 무렵 나는 학교를 다녀와서 친척들과 함께 장성으로 향했다.
장성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오랫동안 대장암으로 고생하셨던 외할아버지의 병문안을 갔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릴 때 나와 놀아주셨던 모습과 너무 달라져버린 외할아버지의 왜소한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들 말이다.
평소 성품이 온화하고, 바르셨던 외할아버지의 지난 생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장례식장은 여러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는 그곳에 3일간 머물며 입관식, 발인까지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도 직장을 다니면서 가까운 지인들의 부모님 장례식장을 찾는 일이 종종 있었고, 과연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책의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기분부전장애(가벼운 우울 증상이 지속되는 상태)를 가진 저자와 정신과 전문의와의 26주간의 대화를 엮은 책이다. 50만 부 기념 스페셜 에디션까지 출판되며, 한국 독자를 넘어 전 세계 독자를 사로잡은 상담 에세이의 걸작이라고 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명성처럼 대단한 영감을 얻거나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깨달았던 것이 있다. 바로 기분부전장애라는 것을 꽤 많은 사람들이 앓고 있고, 공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 : 맞아요. 하지만 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면 더 괴로워져요. '나는 왜 이렇게 유난일까?' 이렇게요. 선생님 : 기분부전장애는 찾아봤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나: 한 번도 제 증상과 딱 맞는 설명이 없었는데, '이건 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설명을 다 읽고 나서는 슬퍼졌어요. '옛날에 이걸 앓고 있던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가 심리학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내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증상들(범불안장애, 간헐적 우울증, 고소공포증 등)을 제대로 알고 싶어서다. 요즘은 다들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 서점에만 가도 심리학 코너 가판대를 보면 어쩜 그렇게 다양한 심리학 서적들이 끊임없이 올라오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만큼 현대인의 정신건강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죽음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이상심리학에 대한 언급으로 글의 흐름을 바꿨던 것은 죽음과 연결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상장애의 원인은 선천적, 후천적으로 경우가 다양하고, 증상도 사람마다 달라서 누군가에게는 약이 필요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담과 치료가 필요하며, 이것저것 다 시도해도 듣지 않아 이른 나이에 삶을 포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 글을 써 내려갈수록 글이 어두워질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는데, 인생을 고작 32년밖에 살아보지 않은 내가 감히 건방지게 삶에 대한 미련이 없다고 떠들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삶에 목적을 잃고 방황할 때, 우울함이 급속도로 심해졌을 때 나는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다. 태어난 것을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죽음에 대해서도 선택할 권리가 없다면 좀 억울할 것 같아 안락사에 대해서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어릴 때는 다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회의주의나 염세주의, 허무주의 등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비슷한 느낌을 가진 주인공이 등장하는 책들(이방인의 뫼르소와 인간실격의 요조 등)에 반감을 느꼈던 것은 어쩌면 그들의 모습이 나의 깊숙한 내면과 닮아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낯선 사람들을 경계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많아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나는 자칫 잘못하면 깊은 수렁으로 빠질 것만 같은 우울감이 내 마음의 수면 아래 늘 잠재되어 있었다.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기만을 바라는 나의 지나친 이상주의에 반하는 사건사고들을 접할 때마다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나의 우울함을 만들었던 것 같다.
살면서 죽음의 순간을 맞닥뜨린 적도 없는 내가 감히 죽음에 대해 운운한다는 것이 배부른 투정과 허세로 느껴질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런 고고한 말들을 쏟아내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죽음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에 담긴 내용처럼(인간은 왜 자살하지 않는가) 삶의 목적과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부조리를 해소하는 최악의 방법이 자살이라는 점이 내가 지금 말하는 삶과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나는 죽음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삶의 이유를 계속 찾아야 하는 사람 같았다. 거창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삶의 끈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이유랄까.
이제 거의 결론에 도달한 것 같다. 사실 이 말을 하려고 지금껏 질질 끌어왔던 것 같기도 하고, 이 사실을 작년에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 감동을 담고 싶기도 했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이 좋다. 그동안 내 삶에 글쓰기란 해우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삶의 이유, 목적 같은 거창한 이유는 대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 활동을 하는 순간의 내가 참 좋다. 계속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그 느낌이 나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것 같다. 작가가 되겠다는 거창한 포부도 아니고, 나의 글로 인해 무언가를 이루어내겠다는 담대한 각오도 아니다. 그저 지금의 나는 주어진 나만의 공간에서 계속 무언가를 써 내려가고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 삶에 큰 원동력이 되어간다는 것을 날마다 배워가는 중이다.
나의 감정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외로움과 고독, 공허함, 우울함 등의 감정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글쓰기였다. 누군가 곁에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썼고, 쓰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