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수다쟁이는 아니고요
'읽고 쓰는 나'와 '말하고 듣는 나'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까.
외향성과 내향성처럼 양면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읽고 쓰는 나일 때도 있고, 말하고 듣는 나일 때도 있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사실 나도 내가 어느 쪽에 가까운지 모르겠다. 혼자 글 쓰고, 책 읽는 시간을 좋아해서 스스로도 당연히 읽고 쓰는 나일 때가 더 내 옷 같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때로는 글로 표현하는 것보다 직접 만나 얼굴을 마주하고, 비언어적인 표현까지 더해가며 대화를 나눌 때 친밀도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까운 누군가와 싸웠을 때도,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면 이모티콘이 사라진 간결한 문장들로 더 딱딱하게 말이 나갈 수 있다. 그렇게 서로 날을 세우고 글로 싸우다가도 막상 얼굴을 마주하면 웃음부터 나오고 스르르 풀리곤 했다. 마치 악플러들의 댓글처럼, 그들이 타인을 향한 비난의 댓글을 적어 내려 갈 때 얼굴을 마주하고도 그런 잔인한 말들을 쏟아낼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어떨 때는 글보다 말이 더 좋다는 생각도 든다.
회사에서도 업무상 메일을 주고받다 보면 정확하고, 간결하게 내용을 전달하다 보니 다소 딱딱한 말투로 전해진다. 근데 만약 메일이 요청보다는 독촉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화로 했을 때보다 글로 접했을 때, 상대방이 더 불쾌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나의 표현력 문제기도 하겠지만, 감정이 담기지 않은 건조한 말투의 글에서 묻어나는 딱딱함은 때로 왜곡되게 받아들여져 오해를 사기도 한다. 내 입장에서도 상대방이 꽤 오랜 시간 답변이 없으면 걱정이 되기도 하고, 나의 메일 내용이 어렵거나, 불쾌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 되기도 한다.
읽고 쓰는 나와 말하고 듣는 나를 나눠보았을 때,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된 상태에서는 읽고 쓰는 나든 말하고 듣는 나든 상대방과의 소통에 큰 무리가 없지만,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을 때 읽고 쓰는 나만 접하다 보면 종종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서로가 배려하고 존중하는 문화에서는 읽고 쓰는 나만으로도 충분히 서로에 대한 관계 형성과 공감이 가능하지만 말이다. 예컨대 내가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서는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 배려 담긴 댓글 문화가 형성되어있다. 그렇기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더 이해하고, 알아가면서 상대방의 진솔한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거나 응원의 말을 건넨다. 하지만, 공통의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회사와 같은 공간에서는 읽고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회의 아닐까.
나는 대화를 할 때 눈을 보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상대방의 눈을 보며 나와 소통하고 있다는 그 느낌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민한 편이다 보니 상대방의 비언어적인 요소에 자연스레 반응하는 경우도 많다.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지나친 의미 부여를 하다 보니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자주 지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면, 읽고 쓰는 나에 조금 더 적합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모임을 지속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구나'였다. 사람을 직접 대면하는 자리에서는 주로 들을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는 상대방의 안부와 근황을 묻고, 자연스레 공감하며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나의 깊은 이야기는 점점 내 속에만 쌓이고 상대방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 채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했다. 관계의 기간이 길어졌음에도 내가 평소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말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글로 표현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니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들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나를 계속 발견하게 된다.
<당신이 글을 쓰면 좋겠습니다>의 홍승은 작가는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더 많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쓰면 좋겠다. 그 문을 통과하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닿고 싶다. 순전히 독자로서 내 욕심이기도 하다.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글을 통해서 우리는 서로의 상상이 될 수 있다. 상상은 머리가 아니라 다양한 몸의 구체적 서사에서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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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모임 공간에서는 읽고 쓰는 나의 모습이 익숙하다. 브런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반면 독서모임에서는 말하고 듣는 나의 모습이 익숙하다. 만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나의 모습이 존재하듯이 읽고 쓰는 나의 모습도 말하고 듣는 나의 모습도 다 하나의 나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추구하는 방향은 '읽고 쓰는 나'와 '말하고 듣는 나'가 적절히 섞여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균형을 맞춰가는 것이다.
하지만 둘 중에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내가 더 붙잡고 싶은 쪽은 '읽고 쓰는 나'이다. 평생 이것만큼은 지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