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 나의 서울 상경기

여전히 생각나는 도시, 창원

by 내민해

7살 꼬마였던 시절, 잠깐 살았던 서울을 떠나 5시간 정도의 이동거리를 가진 낯선 도시 창원으로 이사를 갔다. 아빠의 직장을 따라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10년 가까이 살면서 창원은 나에게 제2의 고향이나 마찬가지가 돼버렸다. 투박한 그 동네 친구들의 사투리도 친근했고, 동네 중간중간 동산이 솟아있어 공기도 맑고, 산책하기도 좋았다. 하지만 창원은 겨울에도 대체로 따뜻한 편이라 눈을 보기가 어려웠다. 내려도 진눈깨비처럼 내리기 일쑤라 어쩌다 함박눈이라도 내리는 겨울이면, 밖에 나가 정신없이 눈싸움하기 바빴다. 지금은 기존의 창원시와 마산시, 진해시가 합쳐지면서 면적도 커지고, 많이 발전했지만 내가 살 당시만 해도 고향 하면 떠오르는 구수한 동네였다.


서울에 다시 이사 왔던 그 해의 겨울이 아직도 생생하다. 밤늦게 도착한 서울의 집은 이삿짐센터에 맡겨놓은 짐이 내일 오전에야 들어오기로 해서 텅텅 비어있었다. 간단하게 저녁을 먹으러 가족들과 역 근처 아울렛 매장으로 갔는데,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잊지 못한다. 창원에 살 때는 시청광장 행사 때나 돼야 볼 법한 수많은 인파가 역 사방에서 쏟아져 나와 이동하고 있던 그 정신없던 모습 말이다. 혼이 나간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싶다. 그때 처음 '아 여기가 서울이구나' 생각했다.


서울은 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처음 전학 갔던 그 해 겨울에는 유독 눈이 많이 내려서 창원에서는 그토록 귀했던 눈을 서울에서는 매일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그것도 매년 말이다. 그렇게 갈망하던 눈을 보고 행복했을 법도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다시 찾은 서울의 첫인상은 차가운 겨울로 기억되고 있다. 눈이 많이 내려서이기도 하지만, 서울 친구들을 사귀는 것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새 학기에 전학 오는 바람에 다들 내가 전학생이라는 사실조차 몰랐고, 입을 여는 순간 사투리가 쏟아지는 나의 말투에 당황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창원 친구들과 결이 조금 달랐다. 창원 친구들은 말투는 다소 투박해도 잔정이 많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느낌이라면, 서울 친구들은 겉으로는 친절한데 차갑고, 단단한 느낌이 있어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다. 깊은 이야기도 잘 안 하고, 각자만의 거리가 존재하는 느낌이랄까. 특히 시험기간은 그 정도가 더 심해지기도 해서 나름의 적응기가 필요했다. 서울깍쟁이라는 말이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알게 모르게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서울에 산 지가 오래돼서 그런 감각들은 이미 무뎌져 버렸고, 오히려 내가 먼저 선을 긋는 사람이 돼버렸다는 것이 함정)


어릴 때 잠깐 살았던 서울과 다시 돌아온 서울의 이미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도 나에게 또 다른 느낌이다. 얼마 전 지방에 사는 친구가 출장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차를 끌고 명동을 들렀다 갔다. 내가 근무하는 곳이 명동 근처라 매일 명동을 오가는데, 내 기준에서는 코로나 여파로 명동 인파가 많이 줄었다고 생각했다. 근데 웬걸, 친구는 그날 명동을 지나치며 나에게 카톡을 쏟아냈다. 대체 서울은 왜 이렇게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어떻게 살 수 있는 거냐고. 출장 왔다가 진심으로 차를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말이다. 또 한 번은 지방에 사는 다른 친구가 서울에 일이 있어 출근시간대의 지하철을 처음으로 경험하고는 나에게 매일 이렇게 출퇴근하냐고 진지하게 물어봤던 적도 있다. 발 디딜 틈도 없는 지하철에서 서로에게 무기력하게 기댄 채 아무런 표정 없이 핸드폰을 보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놀라웠다는 반응이었다. 그 뒤로 다시는 서울에 올라오고 싶지 않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말이다.


내가 맞은 서울의 겨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바로 '리틀 포레스트'다. 주인공은 나와는 반대로 서울살이를 접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간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했지만, 연이은 불합격 소식에 머리를 식히고자 고향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서 어릴 적 친구들을 다시 만나 농사를 배우고 자급자족하면서 삶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과정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사계절을 모두 담고 있지만, 유독 겨울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유는 주인공 혜원이 처음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계절이기 때문이다. 도시생활에 지친 그녀가 터벅터벅 눈길을 밟으며 고향집으로 향하는 그 발걸음이 겨울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들었다. 처음에는 겨울만 머물고 떠나려 했지만, 어느덧 사계절을 보내면서 자신만의 작은 숲을 만들어 간다. 느리게 흐르는 풍경을 통해 농촌의 평화로움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나에게 서울은 여전히 차가운 도시다. 서울에 올라와서 새롭게 만난 인연들이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이 도시의 낯설음은 꽤 긴 여운이 있다. 최근 들어 친해지게 된 친구는 30년이 넘도록 지금 살고 있는 서울의 한 동네에서만 나고 자랐다는데 그 말이 참 신기했다. 그에게는 서울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고향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고향은 어디일까. 태어난 곳일까 아니면 어릴 때의 추억을 가장 많이 간직한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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