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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어울리는 곳에서 살고 싶다

그곳이 어디에 있든

by 내민해

내가 살고 싶은 도시를 고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한 번씩 가본다는 그 도시. 바로 파주출판도시다. 파주출판도시의 정식 명칭은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다. 출판 기획부터 인쇄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산업단지로, 1989년 출판유통구조의 현대화를 꿈꾸던 출판인들이 모여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좋은 공간 속에서 좋은 시각, 좋은 글, 좋은 디자인이 나오고 그것이 곧 바른 책을 펴내는 것으로 연결된다'라는 믿음으로 출발한 파주출판도시는 시대를 앞서 나간 건축물들이 더해지면서 책의 도시이자 건축의 도시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 하루에 매일 1시간 이상은 꼭 걸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처럼 여기저기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느린 동네를 좋아한다. 느린 동네라 함은 주변에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나무와 공원이 있고, 길이 넓으며, 사람의 왕래가 많이 없는 그런 곳. 삶의 편리함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시간의 흐름이 조금 더딘 곳이다. 내가 상상한 파주출판도시의 모습도 이와 닮아있었다. 다양한 출판사와 책의 문화가 함께하기에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곳. 계절의 변화를 알아챌 정도의 여유와 사색이 존재하는 그런 곳 말이다.


하지만 나와 파주의 첫 만남은 내가 상상한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 시기가 하필 명절 연휴라 대부분의 출판사와 카페, 식당 등이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 큰 동네를 걸어 다니며 영화에나 나올 법한 디스토피아, 세기의 종말을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느끼며 마치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명체가 나 밖에 없는 것 같은 고요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바라던 고요함의 극단적인 모습이랄까. 그나마 지혜의 숲(파주출판도시에 위치한 독서복합문화공간)은 열려있어 그곳에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파주출판도시에 두 번째로 방문한 것은 작년 여름휴가(방학이라고 쓸 뻔)였는데, 파주출판도시의 '지혜의 숲'안에 있는 북스테이 공간 지지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지향은 종이의 고향이라는 뜻을 품고 있는 책과 사색을 추구하는 북스테이다. 모든 방에 TV가 없고, 24시간 지혜의 숲에서 책 대여가 가능하며, 우드 소재로 되어있어 자연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방음은 잘 되지 않는 편이다). 나는 1박 2일 동안 파주출판도시 구석구석을 혼자 걷고, 북카페에 들러 책을 읽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혼자 멍 때리며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고요한 시간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쓴다는 황정은 작가의 <일기>라는 에세이에서도 파주를 발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작가가 살고 있는 곳이 파주출판도시 근처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시에 사는 사람 집 근처에 공원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산보가 공원에 묶인 다면 그건 또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삶에는 산보가 필요하고 사람들은 공원을 좋아하니까, 더 많은 도시민의 삶에 공원이 있다면 좋겠다고 썼다가 흠칫 놀랐다. 내가 산보를 이렇게 집요하게 공원과 연결해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공원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이, 말하자면 그 도시가, 걷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기 때문 아닌가?


누구에게나 삶의 공간을 고르는 것에 각자만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곳에 살고 싶다 혹은 나는 이런 조건은 갖춰진 곳이라면 좋겠다 등 자신만의 뚜렷한 기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기준은 느리게 흐르는 동네, 걷기 좋은 동네였다.



파주출판도시를 걸어 다니면서, 그곳에 있는 유일한 주거공간도 발견했다. 헤르만하우스라는 곳인데, 아파트의 편리성과 개인 주택의 프라이빗한 공간의 장점을 모두 살린 친환경 타운하우스다. 서울 용산에서 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따라가면 30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서울 도심권이나 영등포 등으로 이동하는 버스 노선도 풍부한 편이다. 네이버 부동산 기준으로 매매가를 찾아보니 6억 ~ 7억 정도 한다고 한다. 아 물론 내가 지금 당장 여기서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돈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냥 조금 더 구체적으로 관심을 갖고자 이것저것 찾아보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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