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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orygallery Feb 24. 2018

[떠나오기] 마치 구원 같았던 그 빛..​머무름.   

[소심한 여행기: 떠나 다시 오는 것, 여행]  


얼마나 대단한 여행을 해야, '구원'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요? 

어느 곳의 하늘, 어느 빛을 보았길래, '구원'이라 말할 만큼 좋았던 것인지... 


하지만, 

내 모든 여행이 늘 그렇듯. 

'구원'이라는 대단한 단어를 쓸 만큼, 황홀했거나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사진에서 보듯, 

평범한 나무 그늘 아래... 

옅은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던 빛... 이 바로 나의 '구원'이었습니다. 




2014년 가을, 생일을 앞두고 떠났던 세부에서, 

그 좋은 곳까지 가서도, 부족한 잠을 채우려 선베드에 누워 눈을 감았고... 

귓가에선,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들려왔습니다. 


'가슴 시리도록 행복한 꿈을 꾸었지..'라는 가사가 흘러나오던 찰나. 

따뜻한 바람이 귓가와 볼을 스치고, 더운 여름이 몰고 오는 녹음 짙은 내음이 간지럽게 내려앉았어요. 

그리고, 감았던 눈으로 다정하게 내려앉은 빛에 부셔하며 눈을 떠보니.. 

나뭇잎들이 만들어 주던 그늘을 걷어내고, 어느 틈에 빛이 새어 들어왔어요. 


그 빛이, 내겐 구원이었습니다. 


이렇게.. 특별할 것 없는 순간이,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순간으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치이는 서울에서의 직장인은, 

나뭇잎이 만들어 주는 그늘에서 잠들지도, 바람이 만들어 주는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볼 일도, 그리고 그 찰나를 아름답게 담을 여유도 없잖아요. 


오로지...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하게 되는 여행길에서, '아... 이렇게 아름 다운 순간들을 놓치고 살았구나...'라고 회한이 들게 됩니다. 


그렇게 저는, 인생의 구원 같은 그 빛을 보고... 

 '더는 이렇게 살지 않기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참 많이 다른 14년 지기 친구와는, 늘 걷는, 산책길 같은 여행을 하곤 했어요. 

처음 제가 세부 여행을 제안했을 때, 많이 의아해했죠. 


'산책도 마음대로 못하는 위험한 곳 이라니... '에서 시작해서, '뭐? 리조트에서 3박 4일을 보내자고?' 까지...  

그 친구에게 동남아 휴양지 여행은, 마치 '머무름' 같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일상에 치여, 

'머무르기 위해'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머물러 있었어요. 

수영을 좋아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는 수영장에 머무르고, 

맥주를 좋아하는 저는, 선베드에 누워 맥주 마시다 잠들고, 깨서 또 맥주 마시고, 조용히 물속을 거니는 친구를 보고... 그렇게 같은 곳에서 서로 다른 '머무름'으로, 쉬어갔습니다. 



바람도, 햇빛도, 그늘도, 모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그곳에서, 

내가 속한 세계는 잠시 잊어두고, 이 아름다운 곳에서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여행. 



그렇다고, 바깥세상을 아예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에요. 

하루는... 호텔에서 예약해준 택시를 타고, 시내 쇼핑몰을 가 보기도 했습니다. 

교통 체증이 엄청 나서... 잠깐의 외출이, 하루의 관광이 되어 버렸지만. 


알록달록 기념품들도 사 오고, 맛나다던 옐로우캡 피자도 포장해 오고,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며, 친절하게 인사 건네 오던 점원이 만들어준 진한 커피도 마셔보고.. 

무엇보다, 남은 여행을 가득 채워 줄 산미구엘 맥주와 망고, 리치 망고 등. 과일들을 잔뜩 사 올 수 있었어요. 

(결국.. 결론은 맥주..) 



정말... 밥보다 더 많이 먹은 것 같아요. 산미구엘 맥주. 



취향 비슷한 14년 지기 친구들의 여행 마지막 날은, 

우리만의 작은 음악감상회로 마무리 지어졌습니다. 


통 안에 넣으면 소리가 울려, 스피커 효과가 난다는! 

그래서, 커피잔에 넣어두고, 아름다운 뮤지션들의 명곡들과 산미구엘(또 맥주)로 아쉬운 밤을 지새 봅니다. 



자주 봐서, 

특별히 풀어 내거나, 털어 버릴 이야기도 없으니... 

음악이 좋으면 음악을 듣고, 바람이 좋으면 바람을 맞고, 그 순간이 좋으면 그 순간을 즐기는, 

그런 오랜 친구 같은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이 끝나고, 

친구가 찍어 준 한 컷이, 남았습니다. 


지금보단 많이 어린 제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이렇게 살지 않기로' 결심을 한 저는, 여행 내내 웃지도 크게 떠들지도 못했어요. 


많이 바쁘고 여유 없이, 내 앞에 일과 상황에 몰려 살아내다보니, 어느새 서른넷. 

다른 인생을 선택하기에는 너무 많이 와 버린, 겁쟁이가 되어...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가 아닌...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으로... 


여행 내내, 자문자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여행이 끝나고, 진정한 '자문자답'에 들어갔을지도 몰라요. 


이 여행으로부터 3개월 후, '결심'이 생겼고, 

그 후로 또 5개월 후, 저는 새로운 인생을 위한, 그 어떤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여행은, 새로운 '하루'를 살아보는 것 이기도 하지만,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아주 멋진 순간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2014년 가을, 세부 여행에서,

찰나의 빛과 머무름으로, 저는, 아주 값진 새 인생을 얻었습니다. 






이번 여행기는, 저에게 의미가 깊다 보니... 

너무 제 감성을 쏟아내기만 했네요. 

혹, 세부 여행에 대한 짤막한 정보가 필요하실까 싶어, 조금의 정보 덧붙입니다. 


1. 야간비행이었고, 입국 출국 모두 픽업 서비스를 사전에 신청했습니다. 세부는 여러모로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계획 없이 이동하는 일이 없었어요. 


2. 돌아오는 날,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어디를 가기도 그렇고... 공항으로 데려다주는 픽업 서비스와 함께, 한국인이 운영하는 마사지 샵에서 새벽 시간을 보냈어요. 마사지에 더불어 짤막한 수면도 취할 수 있습니다. 


3. 리조트는 '마리바고 블로워터 비치 리조트' 이용했습니다. 조식이 좀 짜긴 했지만 알찼고, 리조트 내 수영장은 물론, 리조트 앞에 인공 해변도 잘 되어 있어요. 다만 해변이 깨끗하진 않아서, 바다 물놀이는 하지 않았어요. 추가 차지를 내고, 수영장 뷰로 업그레이드했는데... 완벽하 선택이었습니다. 금액도 큰 차이가 안 나니, 가능한.. 수영장 뷰나 바다 뷰로 이용하시는 걸 추천해요. 세부 여행은 숙소 선택이 중요하다 해서 엄청 찾다가, 필리핀에서 잠시 어학연수한 동생의 적극 추천으로 가게 되었는데.. 너무너무 만족했어요. 안전하고, 직원들도 참 친절합니다. 


4. 저희는 여행 일정 마지막 날에 쇼핑몰을 나갔는데요. 어차피 한번 가실 거라면, 여행 첫날을 추천합니다. 리조트 바로 앞에 마트가 있는 게 아니라면.. 사실 마트 가는 길도 편치는 않아요. 10분 도보로 한번 다녀왔는데, 두 번은 못 가겠더라고요. 차라리 여행 첫날 택시 예약해서, 시내 쇼핑몰 다녀오세요. 쇼핑몰 가서 여행 내내 필요한 것들... 특히 맥주랑 과일 등. 사 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5. 쇼핑몰은 사실... 현지 분위기 보고, 쇼핑하고.. 이런 것 싫어하시는 분들은 굳이 가지 마셔요. 교통 체증 때문에 차에서 시간 다 버리고, 쇼핑몰도 뭐... 특이한 것은 없어요. 


6. 쇼핑몰 예약도 호텔에서 도와줬어요. 안전한 택시 불러주고, 하루 내내 왕복해 주는 걸로 가격 흥정합니다. 오래돼서 지금은 기억 안 나는데... 데려다주고, 기사님이 돌아가는 시간 묻고, 기다려 줍니다. 시간 약속하고, 약속된 주차장에 가면 아저씨가 안전하게 또 호텔로 데려다줘요. 호텔 앞에도, 그냥 길거리 식당 앞에도, 가드들이 총 들고 지켜줍니다. 그 모습이 더 위축되게 했던 듯. 


7. 리조트와 약속된 경로를 제외, 딱 두 번 둘이서 리조트 밖을 나갔어요. 마트 한번, 식당 한번. 사실... 내 위축된 마음이 무서웠던 거지... 현지인분들이 무섭거나 그러진 않아요. 다만... 리조트 밖을 나서자마자... 길을 안내해 주겠다, 어디 가느냐고 물으며 달려드는... 그 상황은, 여자 둘이 감당하기엔 조금 많이 무서웠어요. 그래서, 그 두 번을 제외하고는, 식사도 놀이도 간식도 모두, 리조트에서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8. 리조트 안에 있는, 해변 쪽에 위치한 칵테일바와 해산물 레스토랑 슈퍼 그레잇! 맛있었어요! 

저기, 아주머니들이 서 계신 곳이 수족관이고, 수족관에서 바로 신선한 해산물을 건져 요리해 줍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팔뚝만 한 바닷가재였어요! 

물론 바깥 식당들 보다야 조금 비싸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감히 맛보지 못할 해산물들을 잔뜩 먹을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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