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액자식 구성 내러티브의 진수

라쇼몽, 羅生門, In The Woods, 1950

by 박연

[영화 <라쇼몽> 소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은 1950년 작품으로 한 남성 (사무라이)가 죽게 되면서 벌어지는 진술을 다룬 영화다. 영화에서는 총 7명이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을 하며 크게 4명의 주인공이 있다. 나무꾼, 사무라이, 여인, 도적이 서로 엇갈리는 진술을 하며 무엇이 진실인지 알기 힘들다. 도적은 자신이 여인을 겁탈하고 결투에서 이겨 사무라이를 살해했다고 말한다. 여인은 도적에게 겁탈당하고 남편(사무라이)에게 모멸감을 느껴 도망쳤다고 말한다. 사무라이는 죽었기 때문에 무당의 입을 빌려 말하지만, 자신은 여인(아내)에게 배신당하였고 쓸쓸히 자결했다고 말한다. 나무꾼은 도적이 여인을 겁탈한 것은 맞지만 여인이 부추겨 도적과 사무라이가 결투를 하긴 했으나 옹졸하기 짝이 없는 개싸움을 벌였다고 진술한다. 이렇게 영화에서는 서로의 주관성을 각각 대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기억의 주관성에 대한 이론을 ‘라쇼몽 효과’라고도 하며 동일한 일을 각 개인이 개연성을 갖는 경우를 뜻한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며, 자신이 유리한 대로 상황을 설명하는 악한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이 겪는 갈등]

* 도적 : 지나가던 사무라이의 아내인 여인을 겁탈하였고, 이로 인해 사무라이를 죽이게 되면서 잡혀오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도적이고, 대단한 싸움을 통해서 여인을 겁탈하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 여인 : 도적에게 속아 사무라이 남편 앞에서 겁탈당하게 된다. 이로써 자신은 남편에게 버려지고, 배신감에 실신하게 된다.


*사무라이 : 도적에게 죽임을 당해 무당의 입을 통해 말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가 겁탈당하는 장면을 보게 되고 아내는 도적을 따라가겠다고 하면서 사무라이를 죽여달라는 말에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이에 자결한다.


*나무꾼 : 숲을 지나면서 여자의 모자를 발견하게 된다. 이에 신고하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자신이 본 내용과 달라 혼란을 겪게 되고 자신이 본 내용을 스님과 나그네에게 말한다. 하지만 나그네가 여인의 검을 훔치지 않았냐는 말에 흠칫 놀라게 된다.


*스님 : 숲을 지나면서 여인과 사무라이를 보게 되면서 증인으로 진술하게 된다. 사람들의 다른 진술을 듣고 나무꾼과 처마 밑에서 혼란에 빠진다. 세상이 혼란해지고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현실에 슬퍼한다.


*나그네 : 지나가면서 비를 피해 처마 밑에 몸을 숨기게 된다. 스님과 나무꾼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듣게 되면서 사건에 흥미를 가진다. 나무꾼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서 여인의 검을 어디에 두었냐고 추궁한다. 처마 뒤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옷을 뺏다가 나무꾼과 싸우게 된다.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갈등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이 하나의 사건으로 모이게 되면서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구성된다. 전체적으로 현재의 이야기를 담당하고 있는 나그네와 나무꾼, 스님의 대화에서 사건 중심에 있는 도적, 여인, 사무라이, 나무꾼 진술이 이어진다. 나무꾼은 여기서 현재와 과거 진술을 연결하는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며 진실을 조금이나마 추리할 수 있는 키(key)를 던져준다.

하지만 나무꾼마저도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무꾼은 여인의 검을 훔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이 검을 훔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며 사건에 휘말리기 싫다는 이유로 정황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하지 않는다.


도적, 여인, 사무라이 3명의 악함이 도드라지지만 나무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는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으로 표현된다. 여기서 나그네는 이야기를 추궁하고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는데 이 사건을 궁금해하면서 나무꾼과 스님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나그네 또한 악한 사람으로 처마 뒤에서 울고 있는 아이의 옷을 훔쳐 입는 것으로 악함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하지만 이것이 악한 일인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스님과 나무꾼은 악한 행동이라며 나무라지만 악한 현실에 나그네의 말에 강하게 반박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갈등 구조로 극적 스릴을 더하고 이야기 구성을 탄탄하게 만드는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라쇼몽> 이후에 이러한 구성의 내러티브의 범죄 스릴러 영화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라쇼몽의 액자식 구성]

<라쇼몽>은 내러티브적으로 액자식 구성을 하고 있다. 크게 스님과 나무꾼, 그리고 나그네 세 명이 처마 밑에서 벌어지는 현재의 사건과 함께 나무꾼, 사무라이, 여인, 도적 4명이 진술하는 과거의 시간이 있다.

들뢰즈의 시간-이미지 이론은 공존할 수 없는 것의 공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공존, 현재와 과거의 공존이다. 이 시간-이미지는 간접적이며 <라쇼몽>에서 나타나는 간접적인 시간-이미지 표현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라쇼몽>은 나무꾼, 사무라이, 여인, 도적 등 7명의 사람이 각자 같은 시간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른 내용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공존할 수 없는 공존이며 영화로써 표현되지 않는다면 상상으로 대체되는 이미지다.

영화 <라쇼몽>에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공존한다. 이는 시간-이미지의 대표적인 사례이며 이 내러티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내러티브에서 가장 선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인물은 스님이다. 스님은 사람들의 진술이 어떤 식으로든 너무나 끔찍하고 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 하지만, 현실은 갓난아이마저 버리고 그 옷을 뺏어 입는 악한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구분할 것인지 스님처럼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마치 <매트릭스>의 빨간약과 파란약 사이에서 갈등하는 네오처럼 말이다.


[거짓의 역량]

직접적인 시간 이미지는 그 경계가 모호해서 잠재성과 현실성이 공존하는 이미지로, 대표적인 예시가 ‘거울 이미지’이다. 거울이 여러 개 있는 공간에 있는 것처럼 반사되는 상의 구분이 어려운 경우 내러티브적 순환 구조에 의해 주연이 조연이 되고, 조연이 주연이 되는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한 경우를 나타낸다. <라쇼몽>에서도 이러한 내러티브적 성격이 나타나는데 7명이 각자 서로의 입장으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자신은 주인공이 된다. 이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는 누구의 진술이냐에 따라 주연이 되기도 하고, 조연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각의 진술에 대한 주인공에 몰입하여 이야기를 듣지만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이런 모호한 것을 나타내는 내러티브를 “잠재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판별 불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잠재적 이미지와 현실적 이미지의 판별 불가능성”은 이미 많은 스릴러 영화에서도 시도되어 왔다. <라쇼몽>은 이러한 내러티브의 시초로써, 관객에게 이미지의 진실 유무를 판별 할 수 없게끔 만들어버린다.


들뢰즈는 이미지 체제를 구분하는 방식을 ‘유기적 체제’와 ‘결정체적 체제’로 나눈다. ‘유기적 체제’는 대상의 독립성을 전제로 카메라에 포착된 순간 이미 현실성의 가치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결정체적 체제’는 이미지 묘사되는 이미지 스스로가 그 존재만으로 유일한 의미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라쇼몽>에서는 사무라이의 죽음을 진술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포착한다. 이는 ‘유기적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진술하는 장면에서는 그것이 그 이야기를 할 때만은 유일한 의미를 지님으로써 ‘결정체적 체제’로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유기적이면서도 결정체적인 이러한 내러티브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지만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사람들의 의견은 주관적이다”라는 것을 전달하기에 적합한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누구도 거짓을 말하지 않고, 누구도 진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영화 <라쇼몽>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입장을 이야기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진술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두 거짓이지도 않고, 진실이지도 않다. 이들은 진리를 감추면서 드러내기도 한다. 네 명의 진술을 모두 합치면 어렴풋이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도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일까? 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이러한 내러티브는 “거울 이미지”라고도 보여질 수 있는데 어느 것이 잔상이고 실재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거울이 여러 개 있는 방에서 어떤 것이 실재이고 잔상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들뢰즈는 경계, 실재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을 넘나드는 영화의 기능을 거짓의 역량의 최종단계라고 이야기한다. 영화는 진리라고 불리는 것에 다차원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이것을 들뢰르는 “진리를 위한 영화”가 아닌 “영화의 진리”라고 설명한다. 그만큼 영화가 가진 힘이 얼마나 영향력이 큰가를 나타내는 말이다. 라쇼몽에서 주인공들의 진술이 이어지면 현재 하는 이야기가 진리라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면 ‘진리’는 아무데도 없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 내러티브 안에서만큼은 ‘진리’라고 볼 수 있다. 전통적인 서사를 붕괴시키면서 거짓의 역량을 드러내고 다양한 시선을 확보하는 것이 진실이 될 가능성이 있는 거짓들의 역할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사건의 중심으로]

전통적인 내러티브는 시간의 흐름으로 영화를 전개시킨다. 하지만 내러티브를 살짝 비틀어 사건의 중심으로 구조를 변경하면 <라쇼몽> 같은 형태가 된다.

라쇼몽은 시간의 흐름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 어떠한 사건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한 영화이다. 이러한 내러티브의 구조는 캐릭터에 더욱 이입을 하게 만들고, 사건을 부각시킨다. <라쇼몽>의 강간 및 살인사건은 사건의 중심으로 내러티브가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리송하다. 게다가 사건의 중심인물들은 모두 다른 내용을 이야기한다. 같은 시간대이지만 다른 캐릭터와 다른 내용의 전개로 극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사건, 캐릭터를 중심으로 두고 내러티브를 짜면 더욱 몰입력 있는 영화를 구성할 수 있다.


[<라쇼몽>과 부분적으로 비슷한 내러티브의 영화]

<라쇼몽>을 오마주한 영화는 최근에도 계속 생산되고 있다. 헐리우드 영화 중 <배트맨> 시리즈는 배트맨을 정의의 사도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배트맨은 어릴 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악과 선 그 둘 중에서 어느 것 하나만을 택하지 않는다. <배트맨 :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도 그렇다. 극 초반에는 선량한 검사로 나오지만 극 후반에는 어떠한 계기로 인해서 악해지기로 마음먹는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 둘 모두에게는 악함과 선함이 공존한다. 이러한 점에서 <라쇼몽>의 내러티브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라라랜드> 또한 비슷한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각각 스토리 라인이 펼쳐진다. 사건 중심이라기 보단 각 인물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어떻게 감정이 달라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한 영화 안에서 각 캐릭터의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극 후반에 남자 주인공의 현실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을 보여주는데, 이는 시간-이미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이트 클럽>은 잭과 타일러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잭과 타일러는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며 ‘거울 이미지’와 같은 현상에 빠진다. 잭이 하는 행동과 타일러가 하는 행동이 극 후반으로 갈수록 맞아 떨어지면서 초반의 모호함을 해소시켜 준다. 영화 여주인공인 말라는 잭과 타일러의 중간에 있는 역할로 현실과 환상을 연결해준다.


<덩케르크>는 해변, 바다, 하늘 각기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스토리를 다루고 있다. 같은 시간대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공간만 다르다. 해변에서 시작되는 내러티브가 바다와 하늘과 합쳐지면서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라쇼몽>은 같은 시간대, 같은 공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덩케르크>는 같은 시간대, 다른 공간,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라쇼몽>과 다른 점은 진실과 거짓이 무엇인지 모호하지는 않다는 점과 특정 주인공을 따라가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김성규. 2015. 들뢰즈의 거짓의 역량을 통해 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덤불 속』과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 동서비교문학저널 제34호. 겨울 29-49

김서영. 2014.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



별점 ★★★★☆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다큐의 탈을 쓴 SF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