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호빵을 한두 번 먹고 잘 안 먹었어요. 호빵 속의 시커먼 팥을 보면 먹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군요. 그러다가 다 큰 어른이 되어 편의점에서 호빵을 먹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사주는 걸 마지못해서 먹었는데요. 어머, 웬일~ 정말 맛이 좋더라고요.
나이가 들면서 입맛이 바뀌었는지 시커멓고 달짝지근한 팥이 너무 맛있었어요. 편의점에서 전기로 쪄주는 호빵 맛에 길들여져서 당시에 꽤나 많이 사 먹고 다녔습니다.
올겨울 들어 호빵을 한 번도 안 먹어서요. 채반에 받쳐서 쪄보았어요. 저는 야채, 잡채가 든 호빵보다는 단팥 호빵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몇 년 사이, 또다시 입맛이 변했는지 한 개 먹으니 두 개는 못 먹겠더라고요.
뜨거운 호빵 하나를 얼른 집어서 접시에 놓았어요. 그러면서 시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공손한 손 -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어릴 때 추운 겨울날, 저녁 밥상에 앉으면 스테인리스 밥뚜껑 위에 손을 올려놓고 식구들을 기다렸어요. 저는 막내라고 엄마가 먼저 밥을 떠주셨거든요.
아빠가 늦게 오시는 날에는 커다란 아빠 밥그릇이 뚜껑을 덮은 채 방바닥 아랫목 이불속에 자리를 하고 있었죠. 그러면 저희 남매들은 그 이불속에서 아빠의 밥그릇에 발가락을 마구 가져다 댔고요. 맨살에 닿은 따끈따끈한 기운을 느끼며 까르륵 웃곤 했지요. 거의 40년 전 이야기인가 봐요. 쿨럭~
호빵을 놓은 이 접시는 저희 외할머니가 쓰시던 건데요. 저희 엄마가 태어나실 때쯤 있었던 접시라니까 80년이 넘은 겁니다. 6.25 사변에도 가까스로 살아난 외할머니의 그릇 세트가 꽤 많이 있었는데 정작 저희들이 이사를 다니며 많이 깨지고 사라지고 했죠.
이 접시는 겉은 멀쩡해 보여도 전자레인지 사용이 안 돼요. 옛날에 만든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깜빡 잊고 전자레인지에 돌렸더니 접시들의 형태가 일그러져서 몇 개는 처리를 했어요. 엄마한테도 언니에게도 저에게도 외할머니의 접시는 남아 있습니다.
외할머니의 접시 위에 뜨거운 호빵 하나를 올리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보았습니다. 호빵이 뜨거워서도 손이 공손해졌고요. 외할머니의 접시와 돌아가신 아버지의 스테인리스 밥그릇 생각까지 하다 보니 손이 더더욱 공손해지는 것 같았어요.